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2010-12-19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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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성탄절 인사를 하겠습니다. 참된 성탄의 축복이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과 산업현장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주 월요일에는 본 교회에서 중요한 모임을 가졌었습니다. 교회자체 중직자 세미나가 있었는데 260여명이 참여하여 저녁식사를 같이 나누고 말씀을 받고 함께 포럼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밤 11시 20분까지 진행되었는데 넉넉히 포럼 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고 시간이 너무 짧다 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도목회를 위한 중직자의 역할”이라는 큰 주제 하에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었는데, 류광수 목사님의 영상 메시지 주제인 “하나신학”즉 한 몸 사상이란 부분으로 “어떻게 중직자들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설 것인가?”를 말씀으로 함께 받았고, 그 후에 이세균 장로님이 중직자로써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강의를 진행했는데, 예배중심의 삶이 되어질 때에 하나님이 우리 삶을 축복하시게 되어 있다는 것을 전달하였습니다. 그 다음 순서로 제가 사도행전 6장 3절에서 7절의 말씀을 가지고 초대교회에 중직자들을 세운 목적을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직자를 세웠는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의 종들이 말씀 운동하는 이 일에 온 교회가 하나로, 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중직자를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늘 장로님의 기도와 같이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있다면 바로 현장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누리게 하는 말씀운동이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고 또한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사실 주의 종들이 서 있는 것이고 또, 이 일을 위해 중직자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행전 6장에 빌립과 스데반 등 일 곱명의 집사들이 그 당시 자기들의 할 일을 해놓고 모두 하나같이 전도현장에 인도받아 갔던 인물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말씀운동, 복음운동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의 종들과 모든 중직자들과 온 성도들이 하나되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교회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내부에 이런 저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 저런 일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기 원하는,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냐 하면, 영적인 비밀을 회복하고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교회 곧 전도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사역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전도를 위한 교회가 되어질 때, 교회부흥을 위한 전도가 아닌 참된 전도를 위한 교회가 되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 시대에 전도를 위한 교회로써 하나님의 대표적인 축복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도해주시고 특별히 앞세우신 중직자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장로님, 장립권사님들과 장립집사님들이 모두가 하나되어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번에 함께 말씀을 받으며 “어떻게 이들에게 말씀으로 섬기고 말씀으로 도울 수 있을까?” 라고 새롭게 기도를 시작한 시간표였습니다. 하나교회 중직자들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교회가 부흥되어지고, 주의 종들이 힘을 얻고, 성도들이 살아나며, 렘넌트들이 일어나는 귀한 축복된 응답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교회 내에서는 전도자의 삶 집중훈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1기생들이 3주간의 훈련을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세요. “목사님, 제가 지난 1기에 훈련을 받았는데 금번 2기에도 훈련을 신청해도 됩니까?” 라고 질문하시기에 “네, 얼마든지 신청해도 됩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신앙생활에 인도 받는 부분을 집중훈련을 통해 체크해보니까 안되어지는 부분들을 한 부분 한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훈련을 한 번 더 인도받게 되면 이 부분들이 되어질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한 번 더 신청해도 됩니까?” 하시기에 “언제든지 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전도자의 삶이 강단에서 계속해서 거론되고 있는데 부담을 가지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담이 아닙니다. 부담이 되는 분들은 이 시간에 참 자유함을 얻고 누리는 시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재 2기와 3기생을 모집을 하고 있는데 2기생은 렘넌트들 중심으로 해서 새벽 5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운동, 독서 등 2주간에 걸쳐 집중훈련에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3기생은 장립 집사님과 장림 권사님 중심으로 구성되어 금요일, 토요일 저녁시간을 이용해 진행되어질 것입니다. 신청현황을 사무실에서 알아보니 이미 2기생과 3기생 모집이 마감되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집중훈련 2기생 대상은 렘넌트인데 혹이나 렘넌트들 가운데 신청 못한 렘넌트들은 후보로 라도 등록해놓으세요. 왜냐하면, 부모님들이 가정의 자녀들에게 이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부모님들이 자녀를 위해 신청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저희 딸이 있습니다만 딸이 집중훈련을 받게 하기 위해서 저와 딸아이를 입금하여 신청했습니다. 제가 집중훈련을 두고 딸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예진아, 집중훈련에 참여 하여 함께 인도를 받아보자” 저희 딸아이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하자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하면 하는 그런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훈련을 하지 않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맡기는 마음으로 신청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부모님들이 거의 다 자녀를 대신하여 신청을 하시던데 집중훈련을 받지 않겠다는 렘넌트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후보라도 등록되면 정리되어질 때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왜 전도자의 삶을 살고자 하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집중훈련 1기생 마지막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단순한 훈련이나 방법 그리고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회복하자는 당연히 누려야 할 신앙의 축복을 회복하자는 것이 전도자의 삶 집중훈련입니다. 인생전체를 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는데 그 축복을 당연히 회복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회복하자는 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고 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만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삶이 실패하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실패의 요인으로 무엇이 자리잡고 있느냐? 과거의 상처들, 과거의 체질들, 과거의 불신앙 등 이런 부분들 때문에 복음을 알고 구원은 받았지만 신앙생활이 제대로 안 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한번 보십시오. 가나안 정복이라는 언약을 붙잡았습니다. 그 언약을 붙잡고 출애굽을 하며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한 엄청난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는 동안에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래사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역사가 기록된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언약을 붙잡은 사람들입니다.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 길 40년의 삶이 불신앙으로 인해 실패한 것을 본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제는 그 생활들을 반복해서는 안 되고 갱신하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다보면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한계에 부딪히면 100% 과거로 다시 돌아갑니다. 과거의 습관들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한계에 부딪히면 믿음으로 도전하기보다는 믿음과 반대되어지는 길로 감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며 실패했다면, 우리만으로는 만족한다 할지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만큼은 참된 축복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에게 축복된 가치 있는 유산이 무엇이겠습니까? 전도하라, 열매 맺으라가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가치있는 유산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전도자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 이 시간에 이 메시지를 듣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축복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워함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받을 축복에 관한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7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전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받을 응답과 축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1장 38절에 보면 불신자인 바로 왕이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바라보며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이 요셉처럼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 여러분, 불신자가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바라보며 한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내용입니까? 전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받을 응답과 축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크게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면 받게 되는 축복입니다.
먼저 첫 번째입니다.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나에게 해답이 되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공하는 길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하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공하기를 원하시죠?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하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모든 역사를, 이 땅의 모든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주관하고 계시는데 무엇으로 이 땅을 움직여나가시느냐? 말씀대로 말씀을 가지고 움직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창조 이전에 인간이 활동하고 누릴 모든 만물들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사건 속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더라” 아무나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냥 만드셔도 됩니다. 그런데 굳이 성경에 “가라사대…” 라고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빛이 있으라 하셨고 그 말씀대로 빛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의 형상가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빠지고 사탄의 운명 가운데 빠진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3장 사건이라 합니다. 개인의 문제의 시작이고 가정의 문제의 시작이며 현장의 문제의 시작인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의 형상 가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고 떠나자마자 하나님은 엄청난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 구원의 계획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핵심이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그 오심이 성경대로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빨리 눈치 채셔야 합니다. 개개인에게 역사하시는 방법도 먼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성취시켜 나가시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100세였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가 90세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경수가 끊어졌다 기록되어 있는데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연령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귀중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자녀를 낳았습니다. 결코 어쩌다보니 저절로 이뤄진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60이 넘은 어르신도 자녀를 생산하셨더라고요. 사람들이 건강해지니까 연세가 있으셔도 출산이 가능한가 보더라고요. 여러분,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도 경수가 끊어졌기에 포기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낳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한 답을 말씀하고 있는데, 창세기 21장 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짧은 이 구절 속에 “말씀하신대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개인도, 가정도, 가문도 이 땅의 모든 역사를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성취시켜 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 할지라도 이 말씀을 언약으로 붙잡지 못하니 방황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데 말씀을 놓치고 갈급하고 방황하는 중에 살아가는 자를 많이 봅니다. 지식인들 가운데도 있고 많은 부를 가진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인생에 대한 중요한 답이 나와 있는데, 답을 찾지 못하니 몸부림치다가 불교로, 방황하다가 결국 이상한 종교로 빠져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실수할 수 있지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시고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 우리 안에 영으로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은 절대 넘어지지 않고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말씀을 붙잡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수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붙잡을 때마다 새 힘을 주시고 새 응답을 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를 떠나라,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할 때 모든 것을 예비해 놓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나왔지만, 예비하신 이 축복을 믿지 못하고 당장 기근이 드니까 애굽에 내려가게 되고 처음 가는 가나안 땅이니까 조카 롯을 데려 나와서 결국 그 조카 롯 때문에 가정과 가문에 문제들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했느냐? 갈대아 우르는 바벨론입니다. 이 갈대아 우르는 나중에 우상숭배로 인해 완전히 멸망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리 인생에, 우리에게 해답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라” 출애굽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불러내신 사실을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사실을 완전한 믿음이 없어서 머뭇거리고 망설인 사실을 보게 되죠. 왜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가라 했느냐? 나중에서야 답이 나왔어요. 결국 애굽은 10가지 재앙이 임하게 되었고 결국 애굽왕은 멸망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해답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지금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이해되어서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게 될 때 말씀이 이해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주어질 때마다 그 말씀을 붙잡고 내가 기도하며 나갈 때 하나님의 때가 되면, 시간표가 되면.. 그 시간표가 누구에게 있느냐?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 시간표가 있습니다. 내게 가장 정확한 시간표에, 가장 정확한 때에 하나님이 그 말씀의 성취를 이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사실을 체험하고 그때부터 강단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는데 지금 내 시간표가 안 되어서 이뤄지지 않을 뿐이지 분명히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받은 말씀을 언젠가는 성취시키실 줄을 믿습니다”라는 그 믿음의 사실을 고백하더라구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는 그 말씀을 성취시키기 위해 주십니다. 그 말씀 붙잡고 그 말씀 속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내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 이 사실을 찾아내면 됩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있으면 결국 하나님이 반드시 지체하지 않고 이루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예배에 참여 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자리에 여러분을 부르셨느냐? 하나님이 주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부르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이 주실 말씀이 없다면 이 자리에 올 필요가 없고, 이 예배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축복으로 주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말씀 붙잡고 돌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붙잡고 기도하면 전도의 문이 열려지게 됩니다. 그걸 가지고 전도자의 삶이라 합니다. 우리에게 시간 시간 주어지는 말씀을 붙잡고 내가 한 주간 현장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전도의 문을 여시게 됩니다. 그게 전도자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기도하고 있으면 말씀이 살아있게 됩니다. 말씀이 살아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한 주간 예배드리기 위해 주일날 교회에 오는데 주일을 기다림으로 기도함으로 말씀을 사모함으로 이 자리에 오신다면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에게 분명히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그와 함께 전도의 문이 열려집니다. 이게 바로 전도자의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도라는 현장을 놓고 말씀을 받게 되면 말씀자체가 살아나요. 그러면 그것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기도이고, 기도응답입니다. 이게 전도자의 삶입니다. 전도자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가장 우선적으로 말씀에 올인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전도자의 삶은 기도의 사실적인 응답을 받는 것이고, 세 번째로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귀한 계획들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집중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의 맛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게 아닙니다. 기도의 맛을 보는 것이고 전도현장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바뀌어지게 되어 있고 내가 보는 것도 달라지게 되어 있고 말씀과 기도와 전도로 집중훈련 받으면서 그때부터 눈이 열려지는데 보는 현장도 다르게 보입니다. 그때부터 내 모든 걸음걸음 속에 그리스도의 역사,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집중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늘 집중훈련 할 수가 없잖아요. 평상시로 돌아가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조금 말씀의 맛을 보고 기도의 맛을 보고 전도의 현장을 봤는데 평상시 늘 항상 말씀이 기다려집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강단의 말씀을 누가 전하던지 간에 그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게 붙잡혀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 놓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다 놓친 겁니다.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가 아닙니다. 진짜 여러분 복음의 맛을 조금이라도 본다면 주일날 강단에 말씀 듣기 위해 앉았다면, 분명히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붙잡혀 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게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붙잡혀 지니까 그 말씀을 받을 사람, 만남의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만남의 축복입니다. “서로 교제하며…” 날마다 우리의 산업현장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죠, 복음의 응답이 나타나죠. 그것이 바로 “떡을 떼며…” 기도를 통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혹여나 집중훈련 받는 가운데 이 응답이 안 누려지면 또 다시 받고 또 다시 받으십시오.
여러분 복음의 맛을 보면 분명히 강단의 말씀이 다르게 들려집니다. 시간 시간 힘이 되어지고 응답이 되어지는 말씀으로 와지게 됩니다. 복음의 맛을 보고 복음의 응답을 누리고 그러면 현장에 문제를 당하면 그 문제 속에서 복음의 비밀을 찾아내게 됩니다. 그 걸음 속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 속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지속적인 복음의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전도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성취를 보기 원하십니까?
특별히 말씀의 핵심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누리는 길이 뭡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길도 그리스도고, 하나님을 누리는 길도 그리스도입니다. 이 사실적인 역사를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나의 말씀으로 해답이 되어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있는데 그것이 본문의 1절입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겠다.”하나님의 말씀을 해답으로 붙잡고 나가는 전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응답이 뭐냐?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이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될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분명히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전도자의 삼에 가장 큰 축복이 있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냥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겠다는 겁니다. 네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준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기준이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성공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 내 직장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는 것. 이것이 성공입니다. 그런데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이리라”는 말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에 보면 모든 언약의 사람들이 이 축복을 누렸습니다. 엘리사가 이 축복을 누렸고, 다니엘과 세친구가 이 축복을 누렸고 요셉이 이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내가 너로 신 같이 되게 하겠다는 이 말은 너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서 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겠다는 그 말도 되지만, 세상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근원적인 축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근본적인 축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두 사람만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삭을 보십시오. 이삭이 농사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축복하시니까 한해 농사에 백배나 받았습니다. 이게 막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렇게 이삭이 축복을 받고 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가 나서 싸움이 벌어졌어요. 샘을 파니까 샘을 빼앗아 가고 샘을 막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왕인 아비멜렉이 도저히 너와 같이 할 수 없다 나를 떠나라고 이삭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가는 곳마다 샘의 근원을 얻게 되는 그 축복을 누렸습니다. 너무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니까 나중에 아비멜렉이 다시 이삭에게 와서 나와 너와 계약을 맺자. 창세기 26장 27절부터 중요한 말을 하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계약을 맺자는 겁니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근원적인 축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근원적인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오늘 새벽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모세는 사실 복음을 누리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 모세가 가진 정체성에서 나왔습니다. 모세의 생애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애굽에서 왕궁생활 할 때가 40년,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미디안 생애가 40년, 광야생애가 40년 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릴 때 이미 어머니를 통해서 네가 어떤 사람이고 너의 백성이 어떤 백성인가 정체성에 대해서 어머니가 유모로 들어가서 분명히 모세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14-26절에 보면 모세가 애굽의 왕궁에 있는 것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더욱 기뻐하고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정체성을 바르게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좋은 배경을 가진 애굽 왕궁에 있을 때 좋은 자리에 있었지만,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니까 그의 인생은 방황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로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결국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거기서 모세가 알고 있었지만 까맣게 놓쳐버렸던 그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 잡혀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80년 전에 모세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네가 어떤 사람이고 네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이 정체성에 대한 부분들이 잡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세가 80평생 한으로 가지고 있던 부분들, 80년 전에 모세의 어머니가 기도제목으로 주었던 이 부분들이 깨달아지고 잡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광야 40년 동안에 이 정체성을 완전히 붙잡은 것입니다. 이 정체성을 완전히 붙잡고 나가는 모세의 걸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정체성을 붙잡은 모세의 걸음 속에 출애굽 하는 과정 속에 일어났던 10가지 기적, 애굽 사람들에게는 10가지 재앙으로 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10가지 기적으로 나타난 이 10가지 기적. 그와 더불어 홍해를 건널 때 주의 사자가 앞서서 바다를 가르고, 뒤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 지팡이 하나 가진게 다인데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역사.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느냐? 모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붙잡는데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힘은 다른데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다른 힘을 주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힘을 주신 것처럼, 모세에게도 정체성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누리는 힘을 얻고 모든 나가는 걸음 속에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던 것처럼 반드시 전도자로 부르신 저와 여러분에게 다른 힘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이 힘을 회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는 이 축복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로, 이 바로를 꺾어야 합니다. 바로는 누구입니까? 영적으로 말하면 사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을 가지고 마귀를 가지고 불신자의 아비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분명히 이 사단, 마귀 존재는 영적인 싸움을 싸워서 승리해야 될 존재입니다. 이 악한 사단, 마귀는 달래서 되는 것이 아니고 타협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기선을 제압해 가지고 먼저 선수를 쳐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어떻게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먼저 선수 쳐야 합니다. 먼저 기선을 제압해야 합니다.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흑암이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2장 28절에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흑암이 꺾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원시복음, 원복음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31절에 “내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여기서의 환란은 우리가 잘못해서 당하는 어려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으로 말미암은 저주와 재앙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할렐루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충만함 속에 들어가서 영적인 싸움을 싸움으로 사단을 꺾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이 축복을 축복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감으로 말씀의 사실적인 성취를,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해답으로 주어지는 이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누림으로 여러분의 걸음걸음마다 나를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역사,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 이 일에 영적인 싸움을 싸움으로 증인되어지는 그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 바로 전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말씀을 회복하며 영적인 싸움을 싸움으로 회복하는 한 주간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나의 모든 산업과 나의 모든 가정과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이 나타나는 귀한 증인된 삶이 되도록 주님 축복해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게 하는 말씀운동이 우리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이렇게 전도를 위한 교회를 하나님이 쓰십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도록 주의 종들과 중직자들과 성도들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전도자의 삶’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생 전체를 놓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된 역사들을 당연히 회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훈련이 ‘전도자의 삶을 위한 집중훈련’입니다. 이제는 ‘전도자의 삶’을 살면서 실패하는 삶을 갱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삶을 누리고, 우리 후대들에게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삶의 응답입니다.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게 될 때 받을 축복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곧 나의 해답이 되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성공의 길입니다.
1)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심(창세기 1장)
2) 구원의 계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 성경대로 되어짐(고전15:3-4)
3) 자녀 낳기를 포기한 사라에게 말씀을 주시고 자녀를 낳게 하심(창21:1)
(2) 우리가 연약하고 모자라도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을 붙잡으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1) 말씀은 우리에게 해답이 됨(말씀 붙잡을 때 비로소 응답을 누린 아브라함과 모세)
2) 이해되지 않더라도 먼저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함(정확한 때에 말씀 성취 됨)
3) 말씀 성취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함(합2:3)
(3)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오라.
1) 전도자의 삶에서 중요한 것
① 가장 우선적으로 말씀에 올인하는 것
② 기도의 사실적인 응답을 받는 것
③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들을 찾아내는 것
2)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사실적인 체험을 해야 함
2. 나를 통해 하나님이 증거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먼저 주십니다(“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1)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겠다는 뜻(신앙인의 성공)
2) 이것은 세상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근원적인 축복임(이삭과 모세의 응답)
3) 하나님은 전도자로 부르신 자들에게 다른 힘을 주셨음
(2) 바로에게 신 같이 되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 바로(사탄)을 꺾어야 합니다.
1) 먼저 선수를 쳐서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함(마12:29)
2) 성령의 충만함으로 흑암이 꺾임(마16:18, 요16:9)
결론: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말씀의 사실적인 성취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해답으로 주어지는 축복을 누리십시오. 이 응답을 누릴 때 걸음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증인 될 것입니다.
지난주 월요일에는 본 교회에서 중요한 모임을 가졌었습니다. 교회자체 중직자 세미나가 있었는데 260여명이 참여하여 저녁식사를 같이 나누고 말씀을 받고 함께 포럼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밤 11시 20분까지 진행되었는데 넉넉히 포럼 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고 시간이 너무 짧다 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도목회를 위한 중직자의 역할”이라는 큰 주제 하에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었는데, 류광수 목사님의 영상 메시지 주제인 “하나신학”즉 한 몸 사상이란 부분으로 “어떻게 중직자들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설 것인가?”를 말씀으로 함께 받았고, 그 후에 이세균 장로님이 중직자로써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강의를 진행했는데, 예배중심의 삶이 되어질 때에 하나님이 우리 삶을 축복하시게 되어 있다는 것을 전달하였습니다. 그 다음 순서로 제가 사도행전 6장 3절에서 7절의 말씀을 가지고 초대교회에 중직자들을 세운 목적을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직자를 세웠는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의 종들이 말씀 운동하는 이 일에 온 교회가 하나로, 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중직자를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늘 장로님의 기도와 같이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있다면 바로 현장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누리게 하는 말씀운동이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고 또한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사실 주의 종들이 서 있는 것이고 또, 이 일을 위해 중직자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행전 6장에 빌립과 스데반 등 일 곱명의 집사들이 그 당시 자기들의 할 일을 해놓고 모두 하나같이 전도현장에 인도받아 갔던 인물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말씀운동, 복음운동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의 종들과 모든 중직자들과 온 성도들이 하나되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교회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내부에 이런 저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 저런 일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기 원하는,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냐 하면, 영적인 비밀을 회복하고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교회 곧 전도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사역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전도를 위한 교회가 되어질 때, 교회부흥을 위한 전도가 아닌 참된 전도를 위한 교회가 되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 시대에 전도를 위한 교회로써 하나님의 대표적인 축복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도해주시고 특별히 앞세우신 중직자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장로님, 장립권사님들과 장립집사님들이 모두가 하나되어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번에 함께 말씀을 받으며 “어떻게 이들에게 말씀으로 섬기고 말씀으로 도울 수 있을까?” 라고 새롭게 기도를 시작한 시간표였습니다. 하나교회 중직자들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교회가 부흥되어지고, 주의 종들이 힘을 얻고, 성도들이 살아나며, 렘넌트들이 일어나는 귀한 축복된 응답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교회 내에서는 전도자의 삶 집중훈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1기생들이 3주간의 훈련을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세요. “목사님, 제가 지난 1기에 훈련을 받았는데 금번 2기에도 훈련을 신청해도 됩니까?” 라고 질문하시기에 “네, 얼마든지 신청해도 됩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신앙생활에 인도 받는 부분을 집중훈련을 통해 체크해보니까 안되어지는 부분들을 한 부분 한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훈련을 한 번 더 인도받게 되면 이 부분들이 되어질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한 번 더 신청해도 됩니까?” 하시기에 “언제든지 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전도자의 삶이 강단에서 계속해서 거론되고 있는데 부담을 가지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담이 아닙니다. 부담이 되는 분들은 이 시간에 참 자유함을 얻고 누리는 시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재 2기와 3기생을 모집을 하고 있는데 2기생은 렘넌트들 중심으로 해서 새벽 5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운동, 독서 등 2주간에 걸쳐 집중훈련에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3기생은 장립 집사님과 장림 권사님 중심으로 구성되어 금요일, 토요일 저녁시간을 이용해 진행되어질 것입니다. 신청현황을 사무실에서 알아보니 이미 2기생과 3기생 모집이 마감되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집중훈련 2기생 대상은 렘넌트인데 혹이나 렘넌트들 가운데 신청 못한 렘넌트들은 후보로 라도 등록해놓으세요. 왜냐하면, 부모님들이 가정의 자녀들에게 이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부모님들이 자녀를 위해 신청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저희 딸이 있습니다만 딸이 집중훈련을 받게 하기 위해서 저와 딸아이를 입금하여 신청했습니다. 제가 집중훈련을 두고 딸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예진아, 집중훈련에 참여 하여 함께 인도를 받아보자” 저희 딸아이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하자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하면 하는 그런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훈련을 하지 않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맡기는 마음으로 신청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부모님들이 거의 다 자녀를 대신하여 신청을 하시던데 집중훈련을 받지 않겠다는 렘넌트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후보라도 등록되면 정리되어질 때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왜 전도자의 삶을 살고자 하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집중훈련 1기생 마지막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단순한 훈련이나 방법 그리고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회복하자는 당연히 누려야 할 신앙의 축복을 회복하자는 것이 전도자의 삶 집중훈련입니다. 인생전체를 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는데 그 축복을 당연히 회복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회복하자는 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고 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만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삶이 실패하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실패의 요인으로 무엇이 자리잡고 있느냐? 과거의 상처들, 과거의 체질들, 과거의 불신앙 등 이런 부분들 때문에 복음을 알고 구원은 받았지만 신앙생활이 제대로 안 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한번 보십시오. 가나안 정복이라는 언약을 붙잡았습니다. 그 언약을 붙잡고 출애굽을 하며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한 엄청난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는 동안에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래사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역사가 기록된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언약을 붙잡은 사람들입니다.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 길 40년의 삶이 불신앙으로 인해 실패한 것을 본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제는 그 생활들을 반복해서는 안 되고 갱신하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다보면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한계에 부딪히면 100% 과거로 다시 돌아갑니다. 과거의 습관들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한계에 부딪히면 믿음으로 도전하기보다는 믿음과 반대되어지는 길로 감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며 실패했다면, 우리만으로는 만족한다 할지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만큼은 참된 축복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에게 축복된 가치 있는 유산이 무엇이겠습니까? 전도하라, 열매 맺으라가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가치있는 유산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전도자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 이 시간에 이 메시지를 듣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축복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워함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받을 축복에 관한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7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전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받을 응답과 축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1장 38절에 보면 불신자인 바로 왕이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바라보며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이 요셉처럼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 여러분, 불신자가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바라보며 한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내용입니까? 전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받을 응답과 축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크게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면 받게 되는 축복입니다.
먼저 첫 번째입니다.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나에게 해답이 되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공하는 길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하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공하기를 원하시죠?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하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모든 역사를, 이 땅의 모든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주관하고 계시는데 무엇으로 이 땅을 움직여나가시느냐? 말씀대로 말씀을 가지고 움직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창조 이전에 인간이 활동하고 누릴 모든 만물들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사건 속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더라” 아무나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냥 만드셔도 됩니다. 그런데 굳이 성경에 “가라사대…” 라고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빛이 있으라 하셨고 그 말씀대로 빛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의 형상가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빠지고 사탄의 운명 가운데 빠진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3장 사건이라 합니다. 개인의 문제의 시작이고 가정의 문제의 시작이며 현장의 문제의 시작인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의 형상 가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고 떠나자마자 하나님은 엄청난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 구원의 계획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핵심이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그 오심이 성경대로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빨리 눈치 채셔야 합니다. 개개인에게 역사하시는 방법도 먼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성취시켜 나가시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100세였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가 90세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경수가 끊어졌다 기록되어 있는데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연령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귀중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자녀를 낳았습니다. 결코 어쩌다보니 저절로 이뤄진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60이 넘은 어르신도 자녀를 생산하셨더라고요. 사람들이 건강해지니까 연세가 있으셔도 출산이 가능한가 보더라고요. 여러분,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도 경수가 끊어졌기에 포기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낳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한 답을 말씀하고 있는데, 창세기 21장 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짧은 이 구절 속에 “말씀하신대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개인도, 가정도, 가문도 이 땅의 모든 역사를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성취시켜 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 할지라도 이 말씀을 언약으로 붙잡지 못하니 방황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데 말씀을 놓치고 갈급하고 방황하는 중에 살아가는 자를 많이 봅니다. 지식인들 가운데도 있고 많은 부를 가진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인생에 대한 중요한 답이 나와 있는데, 답을 찾지 못하니 몸부림치다가 불교로, 방황하다가 결국 이상한 종교로 빠져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실수할 수 있지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시고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 우리 안에 영으로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은 절대 넘어지지 않고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말씀을 붙잡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수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붙잡을 때마다 새 힘을 주시고 새 응답을 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를 떠나라,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할 때 모든 것을 예비해 놓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나왔지만, 예비하신 이 축복을 믿지 못하고 당장 기근이 드니까 애굽에 내려가게 되고 처음 가는 가나안 땅이니까 조카 롯을 데려 나와서 결국 그 조카 롯 때문에 가정과 가문에 문제들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했느냐? 갈대아 우르는 바벨론입니다. 이 갈대아 우르는 나중에 우상숭배로 인해 완전히 멸망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리 인생에, 우리에게 해답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라” 출애굽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불러내신 사실을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사실을 완전한 믿음이 없어서 머뭇거리고 망설인 사실을 보게 되죠. 왜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가라 했느냐? 나중에서야 답이 나왔어요. 결국 애굽은 10가지 재앙이 임하게 되었고 결국 애굽왕은 멸망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해답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지금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이해되어서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게 될 때 말씀이 이해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주어질 때마다 그 말씀을 붙잡고 내가 기도하며 나갈 때 하나님의 때가 되면, 시간표가 되면.. 그 시간표가 누구에게 있느냐?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 시간표가 있습니다. 내게 가장 정확한 시간표에, 가장 정확한 때에 하나님이 그 말씀의 성취를 이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사실을 체험하고 그때부터 강단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는데 지금 내 시간표가 안 되어서 이뤄지지 않을 뿐이지 분명히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받은 말씀을 언젠가는 성취시키실 줄을 믿습니다”라는 그 믿음의 사실을 고백하더라구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는 그 말씀을 성취시키기 위해 주십니다. 그 말씀 붙잡고 그 말씀 속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내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 이 사실을 찾아내면 됩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있으면 결국 하나님이 반드시 지체하지 않고 이루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예배에 참여 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자리에 여러분을 부르셨느냐? 하나님이 주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부르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이 주실 말씀이 없다면 이 자리에 올 필요가 없고, 이 예배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축복으로 주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말씀 붙잡고 돌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붙잡고 기도하면 전도의 문이 열려지게 됩니다. 그걸 가지고 전도자의 삶이라 합니다. 우리에게 시간 시간 주어지는 말씀을 붙잡고 내가 한 주간 현장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전도의 문을 여시게 됩니다. 그게 전도자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기도하고 있으면 말씀이 살아있게 됩니다. 말씀이 살아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한 주간 예배드리기 위해 주일날 교회에 오는데 주일을 기다림으로 기도함으로 말씀을 사모함으로 이 자리에 오신다면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에게 분명히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그와 함께 전도의 문이 열려집니다. 이게 바로 전도자의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도라는 현장을 놓고 말씀을 받게 되면 말씀자체가 살아나요. 그러면 그것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기도이고, 기도응답입니다. 이게 전도자의 삶입니다. 전도자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가장 우선적으로 말씀에 올인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전도자의 삶은 기도의 사실적인 응답을 받는 것이고, 세 번째로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귀한 계획들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집중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의 맛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게 아닙니다. 기도의 맛을 보는 것이고 전도현장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바뀌어지게 되어 있고 내가 보는 것도 달라지게 되어 있고 말씀과 기도와 전도로 집중훈련 받으면서 그때부터 눈이 열려지는데 보는 현장도 다르게 보입니다. 그때부터 내 모든 걸음걸음 속에 그리스도의 역사,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집중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늘 집중훈련 할 수가 없잖아요. 평상시로 돌아가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조금 말씀의 맛을 보고 기도의 맛을 보고 전도의 현장을 봤는데 평상시 늘 항상 말씀이 기다려집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강단의 말씀을 누가 전하던지 간에 그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게 붙잡혀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 놓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다 놓친 겁니다.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가 아닙니다. 진짜 여러분 복음의 맛을 조금이라도 본다면 주일날 강단에 말씀 듣기 위해 앉았다면, 분명히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붙잡혀 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게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붙잡혀 지니까 그 말씀을 받을 사람, 만남의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만남의 축복입니다. “서로 교제하며…” 날마다 우리의 산업현장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죠, 복음의 응답이 나타나죠. 그것이 바로 “떡을 떼며…” 기도를 통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혹여나 집중훈련 받는 가운데 이 응답이 안 누려지면 또 다시 받고 또 다시 받으십시오.
여러분 복음의 맛을 보면 분명히 강단의 말씀이 다르게 들려집니다. 시간 시간 힘이 되어지고 응답이 되어지는 말씀으로 와지게 됩니다. 복음의 맛을 보고 복음의 응답을 누리고 그러면 현장에 문제를 당하면 그 문제 속에서 복음의 비밀을 찾아내게 됩니다. 그 걸음 속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 속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지속적인 복음의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전도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성취를 보기 원하십니까?
특별히 말씀의 핵심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누리는 길이 뭡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길도 그리스도고, 하나님을 누리는 길도 그리스도입니다. 이 사실적인 역사를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나의 말씀으로 해답이 되어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있는데 그것이 본문의 1절입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겠다.”하나님의 말씀을 해답으로 붙잡고 나가는 전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응답이 뭐냐?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이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될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분명히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전도자의 삼에 가장 큰 축복이 있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냥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겠다는 겁니다. 네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준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기준이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성공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 내 직장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는 것. 이것이 성공입니다. 그런데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이리라”는 말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에 보면 모든 언약의 사람들이 이 축복을 누렸습니다. 엘리사가 이 축복을 누렸고, 다니엘과 세친구가 이 축복을 누렸고 요셉이 이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내가 너로 신 같이 되게 하겠다는 이 말은 너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서 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겠다는 그 말도 되지만, 세상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근원적인 축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근본적인 축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두 사람만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삭을 보십시오. 이삭이 농사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축복하시니까 한해 농사에 백배나 받았습니다. 이게 막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렇게 이삭이 축복을 받고 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가 나서 싸움이 벌어졌어요. 샘을 파니까 샘을 빼앗아 가고 샘을 막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왕인 아비멜렉이 도저히 너와 같이 할 수 없다 나를 떠나라고 이삭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가는 곳마다 샘의 근원을 얻게 되는 그 축복을 누렸습니다. 너무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니까 나중에 아비멜렉이 다시 이삭에게 와서 나와 너와 계약을 맺자. 창세기 26장 27절부터 중요한 말을 하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계약을 맺자는 겁니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근원적인 축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근원적인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오늘 새벽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모세는 사실 복음을 누리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 모세가 가진 정체성에서 나왔습니다. 모세의 생애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애굽에서 왕궁생활 할 때가 40년,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미디안 생애가 40년, 광야생애가 40년 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릴 때 이미 어머니를 통해서 네가 어떤 사람이고 너의 백성이 어떤 백성인가 정체성에 대해서 어머니가 유모로 들어가서 분명히 모세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14-26절에 보면 모세가 애굽의 왕궁에 있는 것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더욱 기뻐하고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정체성을 바르게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좋은 배경을 가진 애굽 왕궁에 있을 때 좋은 자리에 있었지만,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니까 그의 인생은 방황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로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결국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거기서 모세가 알고 있었지만 까맣게 놓쳐버렸던 그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 잡혀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80년 전에 모세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네가 어떤 사람이고 네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이 정체성에 대한 부분들이 잡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세가 80평생 한으로 가지고 있던 부분들, 80년 전에 모세의 어머니가 기도제목으로 주었던 이 부분들이 깨달아지고 잡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광야 40년 동안에 이 정체성을 완전히 붙잡은 것입니다. 이 정체성을 완전히 붙잡고 나가는 모세의 걸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정체성을 붙잡은 모세의 걸음 속에 출애굽 하는 과정 속에 일어났던 10가지 기적, 애굽 사람들에게는 10가지 재앙으로 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10가지 기적으로 나타난 이 10가지 기적. 그와 더불어 홍해를 건널 때 주의 사자가 앞서서 바다를 가르고, 뒤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 지팡이 하나 가진게 다인데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역사.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느냐? 모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붙잡는데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힘은 다른데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다른 힘을 주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힘을 주신 것처럼, 모세에게도 정체성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누리는 힘을 얻고 모든 나가는 걸음 속에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던 것처럼 반드시 전도자로 부르신 저와 여러분에게 다른 힘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이 힘을 회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는 이 축복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로, 이 바로를 꺾어야 합니다. 바로는 누구입니까? 영적으로 말하면 사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을 가지고 마귀를 가지고 불신자의 아비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분명히 이 사단, 마귀 존재는 영적인 싸움을 싸워서 승리해야 될 존재입니다. 이 악한 사단, 마귀는 달래서 되는 것이 아니고 타협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기선을 제압해 가지고 먼저 선수를 쳐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어떻게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먼저 선수 쳐야 합니다. 먼저 기선을 제압해야 합니다.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흑암이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2장 28절에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흑암이 꺾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원시복음, 원복음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31절에 “내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여기서의 환란은 우리가 잘못해서 당하는 어려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으로 말미암은 저주와 재앙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할렐루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충만함 속에 들어가서 영적인 싸움을 싸움으로 사단을 꺾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이 축복을 축복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감으로 말씀의 사실적인 성취를,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해답으로 주어지는 이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누림으로 여러분의 걸음걸음마다 나를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역사,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 이 일에 영적인 싸움을 싸움으로 증인되어지는 그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 바로 전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말씀을 회복하며 영적인 싸움을 싸움으로 회복하는 한 주간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나의 모든 산업과 나의 모든 가정과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이 나타나는 귀한 증인된 삶이 되도록 주님 축복해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게 하는 말씀운동이 우리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이렇게 전도를 위한 교회를 하나님이 쓰십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도록 주의 종들과 중직자들과 성도들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전도자의 삶’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생 전체를 놓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된 역사들을 당연히 회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훈련이 ‘전도자의 삶을 위한 집중훈련’입니다. 이제는 ‘전도자의 삶’을 살면서 실패하는 삶을 갱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삶을 누리고, 우리 후대들에게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삶의 응답입니다. 전도자의 삶 속에 들어가게 될 때 받을 축복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곧 나의 해답이 되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성공의 길입니다.
1)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심(창세기 1장)
2) 구원의 계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 성경대로 되어짐(고전15:3-4)
3) 자녀 낳기를 포기한 사라에게 말씀을 주시고 자녀를 낳게 하심(창21:1)
(2) 우리가 연약하고 모자라도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을 붙잡으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1) 말씀은 우리에게 해답이 됨(말씀 붙잡을 때 비로소 응답을 누린 아브라함과 모세)
2) 이해되지 않더라도 먼저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함(정확한 때에 말씀 성취 됨)
3) 말씀 성취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함(합2:3)
(3)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오라.
1) 전도자의 삶에서 중요한 것
① 가장 우선적으로 말씀에 올인하는 것
② 기도의 사실적인 응답을 받는 것
③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들을 찾아내는 것
2)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사실적인 체험을 해야 함
2. 나를 통해 하나님이 증거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먼저 주십니다(“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1)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겠다는 뜻(신앙인의 성공)
2) 이것은 세상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근원적인 축복임(이삭과 모세의 응답)
3) 하나님은 전도자로 부르신 자들에게 다른 힘을 주셨음
(2) 바로에게 신 같이 되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 바로(사탄)을 꺾어야 합니다.
1) 먼저 선수를 쳐서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함(마12:29)
2) 성령의 충만함으로 흑암이 꺾임(마16:18, 요16:9)
결론: 전도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말씀의 사실적인 성취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해답으로 주어지는 축복을 누리십시오. 이 응답을 누릴 때 걸음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증인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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