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
2012-09-30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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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 입니다.” 오늘 찬양대가 부른 찬양처럼 약속을 붙잡은 저와 여러분이 나아가는 모든 현장은 은혜의 바다입니다. 인사하겠습니다. “은혜의 바다를 누립시다.” 약속 붙잡은 자에게는 그 어떤 현장, 환경도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귀한 은혜의 바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내일 부모, 가족, 친지들과의 많은 만남이 있을 것인데, 가정을 위한 중요한 기도제목들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시고, 걸음 걸음 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귀한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자리에는 예배드리고 가실 분들도 있고, 고향에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가장 큰 은혜를 받으시고, 모든 현장을 넉넉히 승리 할 수 있는 축복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에게 고향이 있다는 것과 만나고 인사드릴 수 있는 부모, 가족, 친지들이 있다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어제 하나교회에서 다민족을 초청해서 그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여한 다민족 숫자는 스리랑카를 비롯해서 27명, 교인들이 65명입니다. 그들에게 실제로 한국 문화도 소개하고, 식사도 함께 하면서 메시지도 전달하는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함께 참석해서 도와주시고 또 함께 기도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산상수훈 혹은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보배로운 진리 같은 말씀들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담겨있기 때문에 많은 성경학자 혹은 설교가들이 이 부분을 가지고 설교를 많이 한 사실들을 보게 됩니다. 로이드 존슨 목사님도 산상보훈에 대한 설교만 해도 두꺼운 책으로 몇 권이나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산상보훈 말씀은 사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내용들을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여덟 가지 복이 나옵니다. 세상에 국한되는 순간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온전한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들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사람들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나아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본 자는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6장에도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위기 가운데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사실 구약 시대는 하나님을 본 자는 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분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완전히 낮아지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축복된 문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복음의 특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을 만나고,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축복 가운데 저와 여러분을 불러주셨고, 지금도 우리의 현장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추석 명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할 것인데, 구약적인 의미의 복음을 전달하지 말고 오늘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올 수 있는 비밀을 전달함으로 여러분 현장에 구원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축복된 역사들을 체험하는 시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것을 다 살리는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민족만이 선택받았다는 선민 사상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축복된 복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사명의 자리에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누려야겠다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마치 사람들이 유일하고 특별한 것을 발견하면 특허를 내는 것처럼 복음이 너무 값진 것이기 때문에 특허로 생각해서 남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누리지 못하도록 전하지 않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추석 명절을 통해서 여러분이 있는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과 기쁨과 능력을 마음껏 누리시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처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된 역사 속으로 인도받도록 축복된 전도자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있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현장에 전달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에 이 마음을 가지시고 현장에서 누구든지 예수 믿기를 원하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전도자의 삶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아실 필요가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천국의 축복을 붙잡고 함께 응답받아 현장에 전달되는 말씀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1.심령이 가난한 자 The Poor in Spirit
심령이 가난한 자의 뜻이 무엇입니까?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겸손한 자, 부드러운 자, 악한 사람 보다 선한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대부분 될 수 있는대로 겉으로라도 겸손하고 부드러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먼저 가난의 두 가지 뜻을 아셔야 합니다. 첫 번째는, 페네스(π´ενηζ) 즉, 여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육신적 삶 속에서 하루 벌지 않으면 풀칠하기 어려운 삶으로 매일의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가난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프토코스(πτωχ´οζ)입니다. 상대적인 가난함이 아닌 절대적인 가난함을 말합니다. 절대적인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육신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가난하다는 말을 잘못 오해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청렴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난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해방 신학이 나온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은 절대적인 가난, 빈곤으로 거지처럼 먹을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존한다, 의지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다시 말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시편이나 잠언에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복에 대한 것을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내 자신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람임을 아는 자를 일컬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 잘 모릅니다. 때로는 내가 모든 것 가진 것 같고, 최고인 것 같고, 부족함과 모자람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이 보도록 길 어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라서 구제, 봉사하는 자라고 소리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죄인된 마음으로 숨어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보다 세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분들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족함과 모자람이 없다는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 많은데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시지 않으면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굉장한 것 같고 대단한 것 같은데, 어떤 때는 너무 부족하고 초라하고 무기력 가운데 빠지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알게 하셔야 합니다.
창세기 1:27-28 이 땅에서 가장 축복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모든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한 단어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고 동행하는 비밀 속에서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우리 자신을 설명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어야 될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때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 있어야 하고 새는 공중을 날아야 하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절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스스로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가 드러나고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엄청난 가능성 있는 축복된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비밀들을 놓쳐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마음과 생각은 뻔한데 하는 일들마다 되어지는 일이 없고, 실패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저주가 임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세 너 스스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아담 하와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는 절대 있을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는 자리를 깨우친 것입니다. 또 네가 있어야 될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을 통해 모든 것을 회복하는 비밀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주시면서 약속을 믿는 표로 양의 피를 발라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마다 창세기 3장 사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창세기 1:27-28 하나님 형상의 축복을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21에 보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대단한 존재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전적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100%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이 부분만 인정되어도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게 되는데, 많은 경우 절대적으로 은혜가 필요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칼빈이 이야기 한 신학적 용어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전적 타락 가운데 빠져있다고 합니다. 모든 가능성을 가진 축복되고 존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이 창세기 3장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우리 인생이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전적 타락 속에 빠진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은혜라는 말이 새롭게 보여집니다.
이 땅에 임한 창세기 3장의 실체와 현장들을 정말 아십니까? 다른 모든 것 하기 이 전에 창세기 3장 사건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눈들이 열려지는 만큼 보는 것들이 달라지게 되는데 축복과 응답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현장들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회캠프와 매주 전도캠프로 인도 받습니다. 지난 주에도 교대와 경북예고 중심으로 일일 전도캠프를 나갔습니다. 여러 집사님, 권사님들이 팀을 이뤄 학교로 들어가서 전도지를 돌리고, 학생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현장을 통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냥 전도지를 돌리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창세기 3장 현장이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지에 대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초창기 때 주일마다 예배 마치고 팀을 이뤄서 찬양전도를 했습니다. 진짜 현장이 어떤 상태에 빠져있는지에 대한 눈이 열리는 현장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찬양으로 흑암 꺾고 무언극을 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현장을 체험하는 장이었습니다. 이런 부분이 어느 때부터 사라진 것이 안타까운 부분 중 하나입니다. 제가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면, 찬양하고 나서 무언극을 하는데 젊은 청년 한명이 유심히 현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권사님 한분이 옆에 붙어서 복음을 전하니 순간 그 청년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영접했습니다. 그 후에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가게에 가서 음료를 사서 찬양전도팀들을 대접하면서 교회로 연결되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 청년의 부모님들은 대순진리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도 대순진리교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후 이런 저런 종교들을 많이 가져봤는데 지금 자신에게 온 결과는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이고 매일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권사님이 전하는 복음이 꼭 자신 이야기 같았다고 합니다. 진짜 창세기 3장 불신자 현장들을 보는 시간들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적, 이론적,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물에도 알칼리 수를 먹어야 한다 등 좋은 물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총회에 가니까 물을 선전하기 위해서 현미경을 두고 검사하는 것을 봤습니다. 현미경을 통해서 피를 보면서 이야기 하는 내용은 이 물 먹어야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몸은 70% 이상이 물이기 때문에 좋은 물을 마시면 좋습니다. 그런데 마셔보지 않으면 이익이 되는지 안되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무리 미국을 안다고 할 지라도 다녀온 자와 안 다녀온 자는 차이가 납니다. 안 다녀온 사람이 아무리 미국을 잘 설명한다 할지라도 실제적인 지식이 아니기에 차이가 나게 됩니다. 창세기 3장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장의 현장, 실체들을 얼마만큼 아느냐? 여기서부터 모든 응답의 문들이 다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3장 사건은 하나님을 떠난 사건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의 시작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이 죄로 인해 인생이 사단의 손에 붙잡힌 것입니다. 신분과 소속이 마귀의 자녀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 중의 문제가 우상숭배와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근본적인 것을 모르기에 우상숭배가 죄임을, 제사지내는 것이 귀신을 불러오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면 할수록 마음과 정신은 평안이 없고, 육신도 끊임없는 우환질고로 고통받게 됩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도 지옥의 삶을 살게 되고 죽어서도 지옥에 가게 됩니다. 결국 후손들에게 영적인 문제를 물려주게 되는 창세기 3장의 실체를 얼마만큼 아시냐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떠난 문제, 죄 문제, 사단의 문제를 알면 이가 갈립니다. 악한 사단이 영적문제를 가지고 한 가정을 파고들어서 후손들까지 멸망시키는 사실을 보면 이가 갈리게 됩니다. 진짜 응답받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의 현장과 실체를 보는 눈들이 열려야 합니다. 이 눈이 열리는 만큼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지고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됩니다.
멸망가운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인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건져주시고 해방시켜 주셨구나! 제사 지내지 않아도 되는 해방된 자로, 자유로운 자로 나를 축복하셨구나! 여기에 대한 가치가 깨달아질 때 나에 대한 존재 가치가 새롭게 보여지게 됩니다. 또 믿지 않는 자를 볼 때 진짜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스스럼없이 입을 열어서 그리스도를 말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너희 아비 마귀"라 했습니다. 잘되는 것 같지만 마귀의 종노릇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저와 여러분을 건져내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실제로 부모라 할지라도 창세기 3장 현장 속에 있으면 멸망받게 되어있습니다.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이 부모들의 영적인 배경을 안다면, 창세기 3장을 안다면 부모를 볼 때 간절하고 애통한 마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2부 예배 올라오기 전에 한 렘넌트가 제게 기도를 받고 나가면서 울면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녀로 언약가운데 있는데 우리 엄마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엄마를 생각할 때 마다 너무 불쌍합니다. 기도해주세요." 그렇습니다. 나 자신과 가족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 가운데 얼마나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가는데 저주와 재앙이 왜 일어나는지 알게 됩니다.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생임을 보는 눈이 열려지게 됩니다.
유명한 과학자들이 얼마나 좋은 것들과 유익된 것을 많이 발견합니까. 심지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합니다. 아무리 이름있는 유명한 과학자들이 발견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편리함과 유익함을 주기 보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해로움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 현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비밀을 알지 못해서 세상 사람들이 멸망받고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과 비밀을 모르는 자들이 모든 문화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어려움 가운데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그리스도 없이는 나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사단은 순간 순간 공격해옵니다. 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그리스도 없이는 한 순간도 설 수 없음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제 자신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짜 우리 인생을 알고, 현장을 알면 내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닝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깨달아지게 됩니다. 이 눈이 열리면 여기서부터 모든 축복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여덟 가지 복을 의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된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2.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His Disciples Came to Him
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여기에서 살펴볼 부분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와 창세기 3장의 비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따로 제자들을 불러서 메시지를 하신 것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메시지를 한 것이 아니라 무리 속 제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와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의 모든 축복된 말씀, 성취되는 말씀을 누리려면 저와 여러분이 제자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냥 내가 갈급해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제자로 부르신 부름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는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스승을 따라다닙니다. 유명한 스승이 있으면 제자들이 가서 배우고자 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랍비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제자들이 모아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직접, 친히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은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귀한 제자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직접 선택한 제자들이 있는 반면에 내가 원해서 갈급해서 나아온 자들이 있습니다. 혹이나 때에 따라서 세상에서 이리 저리 방황해봐도 답이 없어서 내가 갈급해서 온 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불러 제자로 삼아주셨다는 확신 가운데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제자됨에 확신이 와야 참된 축복이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의 축복이 여러분과 상관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서 말하는 천국이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앞서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에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제 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습니다. 여기에서 천국은 물론 우리가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천국도 말씀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이 땅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현장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천상에서 천지 만물을 다스렸는데 그 뒤에 창세기 3장 사건으로 사단이 하나님의 축복받아야 할 사람들을 장악하고 이 땅의 모든 역사들을 흑암과 재앙의 역사들로 이끌어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장 속에 천국이 임한다는 말은 저주와 재앙의 현장 속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축복된 현장으로 바꾸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창세기 3장 현장까지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확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우리의 모든 현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저주와 재앙이 임하는 창세기 3장의 현장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해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우리 안에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천국을 가진 자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가는 모든 현장에, 특별히 추석을 통한 모든 만남 속에 천국을 나타낼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없이 절대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창세기 3장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번 한 주간 현장에서 누리시기 바랍니다. 새하늘과 새땅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 갈 때에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고, 이 땅에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주와 재앙속 까지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축복된 주역으로 저와 여러분을 세워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누리는 귀한 추석이 되시고, 이것을 누리는 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심령이 가난한 자임을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열려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참으로 많습니다. 아니, 사실은 전부 다 심령이 가난한 자인데 심령이 가난한 자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은 영적인 거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자들이 손을 벌릴 줄 모르고, 구걸할 줄 모르는 것이 이 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구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축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이런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내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진짜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 순간, 하루를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되시기 바랍니다. 내 모든 삶 속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하면서도 가난한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현장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너도 나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이러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을 증거하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간증하는 추석 명절이 되시고 이 번 한주간이 되어짐으로 여러분의 삶이 축복된 역사를 응답으로 누리는 승리하는 한주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심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신 하늘 나라의 축복을 창세기 3장 현장속에서 누릴 수 있도록 귀한 축복된 자리에 저와 모든 성도들을 세워주심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특별히 모든 현장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축복의 비밀들이 누려지는 최고의 한 주간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걸음과 만남과 사건과 일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축복된 응답을 누리는 귀중한 한 주간 되도록 주의 종들의 걸음에 복을 내려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012년 9월 30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심령이 가난한 자
(마5:1-6)
서론: 하나님을 본 자는 즉사하기에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아무도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 오셨기에 본문에서처럼 누구든지 그분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게 됩니다(행2:21, 히10:19-20). 하나님은 이 축복이 우리를 통해 현장에 전달되기를 원하십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1)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의 의미
1) 겸손하고 부드럽다는 의미가 아님
2) 여기에 쓰인 '가난'은 육신적인 가난함이 아니라 심령이 절대적으로 가난하다는 의미임
3) 따라서 영적으로 내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안다는 뜻임
(2)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눈을 열어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1) 인생에 대한 올바른 영적 지식
① 하나님께서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가장 축복된 존재로 창조하심(창1:27-28)
② 창세기 3장 문제에 빠져 임마누엘 비밀 놓치고 하나님 형상 잃어버림
③ 이때부터 실패의 역사가 일어나고 저주가 임하게 됨(창3:16-19)
④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심(창3:15)
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생은 전적무능, 전적부패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음
2) 창세기 3장 문제의 실체를 알라
① 이론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기에 현장에서 체험해야 함
② 이를 알면 나의 존재가치가 새롭게 깨달아지고, 그리스도를 말할 수밖에 없게 됨
(3) 하나님을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2.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1)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을 부르셔서 말씀했습니다.
1) 창세기 3장의 비밀과 그리스도를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따로 제자를 부르심
2) 예수님께서 나를 무리가 아닌 제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함
(2) 제자에게 주신 첫째 말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1)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을 의미
2) 재앙의 창세기 3장의 현장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의미함
결론: 나 자신이 심령이 가난한 자임을 아십시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소망)이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하면서도 가난한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간증하는 추석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는 예배드리고 가실 분들도 있고, 고향에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가장 큰 은혜를 받으시고, 모든 현장을 넉넉히 승리 할 수 있는 축복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에게 고향이 있다는 것과 만나고 인사드릴 수 있는 부모, 가족, 친지들이 있다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어제 하나교회에서 다민족을 초청해서 그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여한 다민족 숫자는 스리랑카를 비롯해서 27명, 교인들이 65명입니다. 그들에게 실제로 한국 문화도 소개하고, 식사도 함께 하면서 메시지도 전달하는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함께 참석해서 도와주시고 또 함께 기도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산상수훈 혹은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보배로운 진리 같은 말씀들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담겨있기 때문에 많은 성경학자 혹은 설교가들이 이 부분을 가지고 설교를 많이 한 사실들을 보게 됩니다. 로이드 존슨 목사님도 산상보훈에 대한 설교만 해도 두꺼운 책으로 몇 권이나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산상보훈 말씀은 사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내용들을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여덟 가지 복이 나옵니다. 세상에 국한되는 순간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온전한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들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사람들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나아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본 자는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6장에도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위기 가운데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사실 구약 시대는 하나님을 본 자는 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분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완전히 낮아지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축복된 문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복음의 특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을 만나고,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축복 가운데 저와 여러분을 불러주셨고, 지금도 우리의 현장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추석 명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할 것인데, 구약적인 의미의 복음을 전달하지 말고 오늘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올 수 있는 비밀을 전달함으로 여러분 현장에 구원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축복된 역사들을 체험하는 시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것을 다 살리는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민족만이 선택받았다는 선민 사상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축복된 복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사명의 자리에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누려야겠다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마치 사람들이 유일하고 특별한 것을 발견하면 특허를 내는 것처럼 복음이 너무 값진 것이기 때문에 특허로 생각해서 남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누리지 못하도록 전하지 않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추석 명절을 통해서 여러분이 있는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과 기쁨과 능력을 마음껏 누리시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처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된 역사 속으로 인도받도록 축복된 전도자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있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현장에 전달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에 이 마음을 가지시고 현장에서 누구든지 예수 믿기를 원하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전도자의 삶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아실 필요가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천국의 축복을 붙잡고 함께 응답받아 현장에 전달되는 말씀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1.심령이 가난한 자 The Poor in Spirit
심령이 가난한 자의 뜻이 무엇입니까?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겸손한 자, 부드러운 자, 악한 사람 보다 선한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대부분 될 수 있는대로 겉으로라도 겸손하고 부드러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먼저 가난의 두 가지 뜻을 아셔야 합니다. 첫 번째는, 페네스(π´ενηζ) 즉, 여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육신적 삶 속에서 하루 벌지 않으면 풀칠하기 어려운 삶으로 매일의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가난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프토코스(πτωχ´οζ)입니다. 상대적인 가난함이 아닌 절대적인 가난함을 말합니다. 절대적인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육신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가난하다는 말을 잘못 오해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청렴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난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해방 신학이 나온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은 절대적인 가난, 빈곤으로 거지처럼 먹을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존한다, 의지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다시 말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시편이나 잠언에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복에 대한 것을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내 자신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람임을 아는 자를 일컬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 잘 모릅니다. 때로는 내가 모든 것 가진 것 같고, 최고인 것 같고, 부족함과 모자람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이 보도록 길 어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라서 구제, 봉사하는 자라고 소리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죄인된 마음으로 숨어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보다 세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분들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족함과 모자람이 없다는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 많은데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시지 않으면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굉장한 것 같고 대단한 것 같은데, 어떤 때는 너무 부족하고 초라하고 무기력 가운데 빠지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알게 하셔야 합니다.
창세기 1:27-28 이 땅에서 가장 축복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모든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한 단어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고 동행하는 비밀 속에서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우리 자신을 설명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어야 될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때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 있어야 하고 새는 공중을 날아야 하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절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스스로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가 드러나고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엄청난 가능성 있는 축복된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비밀들을 놓쳐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마음과 생각은 뻔한데 하는 일들마다 되어지는 일이 없고, 실패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저주가 임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세 너 스스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아담 하와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는 절대 있을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는 자리를 깨우친 것입니다. 또 네가 있어야 될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을 통해 모든 것을 회복하는 비밀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주시면서 약속을 믿는 표로 양의 피를 발라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마다 창세기 3장 사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창세기 1:27-28 하나님 형상의 축복을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21에 보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대단한 존재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전적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100%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이 부분만 인정되어도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게 되는데, 많은 경우 절대적으로 은혜가 필요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칼빈이 이야기 한 신학적 용어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전적 타락 가운데 빠져있다고 합니다. 모든 가능성을 가진 축복되고 존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이 창세기 3장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우리 인생이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전적 타락 속에 빠진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은혜라는 말이 새롭게 보여집니다.
이 땅에 임한 창세기 3장의 실체와 현장들을 정말 아십니까? 다른 모든 것 하기 이 전에 창세기 3장 사건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눈들이 열려지는 만큼 보는 것들이 달라지게 되는데 축복과 응답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현장들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회캠프와 매주 전도캠프로 인도 받습니다. 지난 주에도 교대와 경북예고 중심으로 일일 전도캠프를 나갔습니다. 여러 집사님, 권사님들이 팀을 이뤄 학교로 들어가서 전도지를 돌리고, 학생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현장을 통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냥 전도지를 돌리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창세기 3장 현장이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지에 대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초창기 때 주일마다 예배 마치고 팀을 이뤄서 찬양전도를 했습니다. 진짜 현장이 어떤 상태에 빠져있는지에 대한 눈이 열리는 현장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찬양으로 흑암 꺾고 무언극을 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현장을 체험하는 장이었습니다. 이런 부분이 어느 때부터 사라진 것이 안타까운 부분 중 하나입니다. 제가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면, 찬양하고 나서 무언극을 하는데 젊은 청년 한명이 유심히 현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권사님 한분이 옆에 붙어서 복음을 전하니 순간 그 청년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영접했습니다. 그 후에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가게에 가서 음료를 사서 찬양전도팀들을 대접하면서 교회로 연결되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 청년의 부모님들은 대순진리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도 대순진리교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후 이런 저런 종교들을 많이 가져봤는데 지금 자신에게 온 결과는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이고 매일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권사님이 전하는 복음이 꼭 자신 이야기 같았다고 합니다. 진짜 창세기 3장 불신자 현장들을 보는 시간들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적, 이론적,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물에도 알칼리 수를 먹어야 한다 등 좋은 물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총회에 가니까 물을 선전하기 위해서 현미경을 두고 검사하는 것을 봤습니다. 현미경을 통해서 피를 보면서 이야기 하는 내용은 이 물 먹어야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몸은 70% 이상이 물이기 때문에 좋은 물을 마시면 좋습니다. 그런데 마셔보지 않으면 이익이 되는지 안되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무리 미국을 안다고 할 지라도 다녀온 자와 안 다녀온 자는 차이가 납니다. 안 다녀온 사람이 아무리 미국을 잘 설명한다 할지라도 실제적인 지식이 아니기에 차이가 나게 됩니다. 창세기 3장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장의 현장, 실체들을 얼마만큼 아느냐? 여기서부터 모든 응답의 문들이 다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3장 사건은 하나님을 떠난 사건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의 시작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이 죄로 인해 인생이 사단의 손에 붙잡힌 것입니다. 신분과 소속이 마귀의 자녀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 중의 문제가 우상숭배와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근본적인 것을 모르기에 우상숭배가 죄임을, 제사지내는 것이 귀신을 불러오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면 할수록 마음과 정신은 평안이 없고, 육신도 끊임없는 우환질고로 고통받게 됩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도 지옥의 삶을 살게 되고 죽어서도 지옥에 가게 됩니다. 결국 후손들에게 영적인 문제를 물려주게 되는 창세기 3장의 실체를 얼마만큼 아시냐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떠난 문제, 죄 문제, 사단의 문제를 알면 이가 갈립니다. 악한 사단이 영적문제를 가지고 한 가정을 파고들어서 후손들까지 멸망시키는 사실을 보면 이가 갈리게 됩니다. 진짜 응답받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의 현장과 실체를 보는 눈들이 열려야 합니다. 이 눈이 열리는 만큼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지고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됩니다.
멸망가운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인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건져주시고 해방시켜 주셨구나! 제사 지내지 않아도 되는 해방된 자로, 자유로운 자로 나를 축복하셨구나! 여기에 대한 가치가 깨달아질 때 나에 대한 존재 가치가 새롭게 보여지게 됩니다. 또 믿지 않는 자를 볼 때 진짜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스스럼없이 입을 열어서 그리스도를 말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너희 아비 마귀"라 했습니다. 잘되는 것 같지만 마귀의 종노릇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저와 여러분을 건져내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실제로 부모라 할지라도 창세기 3장 현장 속에 있으면 멸망받게 되어있습니다.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이 부모들의 영적인 배경을 안다면, 창세기 3장을 안다면 부모를 볼 때 간절하고 애통한 마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2부 예배 올라오기 전에 한 렘넌트가 제게 기도를 받고 나가면서 울면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녀로 언약가운데 있는데 우리 엄마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엄마를 생각할 때 마다 너무 불쌍합니다. 기도해주세요." 그렇습니다. 나 자신과 가족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 가운데 얼마나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가는데 저주와 재앙이 왜 일어나는지 알게 됩니다.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생임을 보는 눈이 열려지게 됩니다.
유명한 과학자들이 얼마나 좋은 것들과 유익된 것을 많이 발견합니까. 심지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합니다. 아무리 이름있는 유명한 과학자들이 발견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편리함과 유익함을 주기 보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해로움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 현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비밀을 알지 못해서 세상 사람들이 멸망받고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과 비밀을 모르는 자들이 모든 문화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어려움 가운데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그리스도 없이는 나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사단은 순간 순간 공격해옵니다. 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그리스도 없이는 한 순간도 설 수 없음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제 자신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짜 우리 인생을 알고, 현장을 알면 내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닝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깨달아지게 됩니다. 이 눈이 열리면 여기서부터 모든 축복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여덟 가지 복을 의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된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2.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His Disciples Came to Him
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여기에서 살펴볼 부분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와 창세기 3장의 비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따로 제자들을 불러서 메시지를 하신 것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메시지를 한 것이 아니라 무리 속 제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와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의 모든 축복된 말씀, 성취되는 말씀을 누리려면 저와 여러분이 제자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냥 내가 갈급해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제자로 부르신 부름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는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스승을 따라다닙니다. 유명한 스승이 있으면 제자들이 가서 배우고자 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랍비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제자들이 모아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직접, 친히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은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귀한 제자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직접 선택한 제자들이 있는 반면에 내가 원해서 갈급해서 나아온 자들이 있습니다. 혹이나 때에 따라서 세상에서 이리 저리 방황해봐도 답이 없어서 내가 갈급해서 온 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불러 제자로 삼아주셨다는 확신 가운데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제자됨에 확신이 와야 참된 축복이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의 축복이 여러분과 상관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서 말하는 천국이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앞서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에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제 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습니다. 여기에서 천국은 물론 우리가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천국도 말씀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이 땅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현장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천상에서 천지 만물을 다스렸는데 그 뒤에 창세기 3장 사건으로 사단이 하나님의 축복받아야 할 사람들을 장악하고 이 땅의 모든 역사들을 흑암과 재앙의 역사들로 이끌어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장 속에 천국이 임한다는 말은 저주와 재앙의 현장 속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축복된 현장으로 바꾸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창세기 3장 현장까지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확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우리의 모든 현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저주와 재앙이 임하는 창세기 3장의 현장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해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우리 안에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천국을 가진 자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가는 모든 현장에, 특별히 추석을 통한 모든 만남 속에 천국을 나타낼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없이 절대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창세기 3장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번 한 주간 현장에서 누리시기 바랍니다. 새하늘과 새땅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 갈 때에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고, 이 땅에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주와 재앙속 까지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축복된 주역으로 저와 여러분을 세워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누리는 귀한 추석이 되시고, 이것을 누리는 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심령이 가난한 자임을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열려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참으로 많습니다. 아니, 사실은 전부 다 심령이 가난한 자인데 심령이 가난한 자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은 영적인 거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자들이 손을 벌릴 줄 모르고, 구걸할 줄 모르는 것이 이 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구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축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이런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내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진짜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 순간, 하루를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되시기 바랍니다. 내 모든 삶 속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하면서도 가난한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현장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너도 나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이러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을 증거하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간증하는 추석 명절이 되시고 이 번 한주간이 되어짐으로 여러분의 삶이 축복된 역사를 응답으로 누리는 승리하는 한주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심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신 하늘 나라의 축복을 창세기 3장 현장속에서 누릴 수 있도록 귀한 축복된 자리에 저와 모든 성도들을 세워주심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특별히 모든 현장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축복의 비밀들이 누려지는 최고의 한 주간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걸음과 만남과 사건과 일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축복된 응답을 누리는 귀중한 한 주간 되도록 주의 종들의 걸음에 복을 내려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012년 9월 30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심령이 가난한 자
(마5:1-6)
서론: 하나님을 본 자는 즉사하기에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아무도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 오셨기에 본문에서처럼 누구든지 그분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게 됩니다(행2:21, 히10:19-20). 하나님은 이 축복이 우리를 통해 현장에 전달되기를 원하십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1)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의 의미
1) 겸손하고 부드럽다는 의미가 아님
2) 여기에 쓰인 '가난'은 육신적인 가난함이 아니라 심령이 절대적으로 가난하다는 의미임
3) 따라서 영적으로 내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안다는 뜻임
(2)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눈을 열어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1) 인생에 대한 올바른 영적 지식
① 하나님께서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가장 축복된 존재로 창조하심(창1:27-28)
② 창세기 3장 문제에 빠져 임마누엘 비밀 놓치고 하나님 형상 잃어버림
③ 이때부터 실패의 역사가 일어나고 저주가 임하게 됨(창3:16-19)
④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심(창3:15)
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생은 전적무능, 전적부패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음
2) 창세기 3장 문제의 실체를 알라
① 이론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기에 현장에서 체험해야 함
② 이를 알면 나의 존재가치가 새롭게 깨달아지고, 그리스도를 말할 수밖에 없게 됨
(3) 하나님을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2.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1)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을 부르셔서 말씀했습니다.
1) 창세기 3장의 비밀과 그리스도를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따로 제자를 부르심
2) 예수님께서 나를 무리가 아닌 제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함
(2) 제자에게 주신 첫째 말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1)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을 의미
2) 재앙의 창세기 3장의 현장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의미함
결론: 나 자신이 심령이 가난한 자임을 아십시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소망)이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하면서도 가난한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간증하는 추석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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