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
2015-04-26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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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
(롬1:18~32)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1:18~32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그의 손이 그 일을 마치십니다! 오늘 성찬식 예배를 통해서 최고로 복음을 많이 누리는 가장 귀하고 복된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찬양대 찬송 부른 내용이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Amazing Grace’입니다. 이게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애창하고 있는 찬송 1위입니다. 제일 많이 불리고 있는 것이 오늘 찬송 불렀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죄악 가운데 영원히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신 그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늘 충만하게 넘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현장을 살리게 되고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야기를 하면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은 우리가 쉽게 던질 수 있는 말입니다만 정말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내게 정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가? 내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날마다 우리에게 있는가? 대부분의 삶 속에서 실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누리지 못하니까 삶에 지배당하고 현장에 지배당하고, 현장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정복당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그 무엇보다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핍박과 어려움과 문제들 앞에서도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현장을 정복해 나갔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지금 교회가 힘을 잃고 있고 성도들이 현장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고 성도들이 현장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데 그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니까 현장에서 무너지고 현장에서 복음이 부끄러운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회복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면 정말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 구원받기 이전에 내 상태가 어떤 상태였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내 상태가 어떤 상태였던가를 사실적으로 알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게 되어 있고, 사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그것이 전부라는, 신앙 생활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답이 내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눈을 열어서 꼭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봐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내 상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기 이전에 나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였는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 있다면 다른 부분에서도 있지만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8절~32절 이 말씀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내 상태가 어떤 상태였던가를 잘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나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 상태였던가를 다시 한 번 여러분이 영안을 열어서 보심으로 말미암아 오늘 성찬예식을 대할 때에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신 그 구원의 축복에 대한 은혜와 감사와 감격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로마서 1장 17절~18절에 지난주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러면서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하면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복음을 바울이 깨닫고 나니까, 이 복음의 역사를 깨닫고 나니까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눈이 열려졌는데 복음 받지 못하고 있을 때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였는지에 대한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그런 죄들이 가장 큰 죄라는 사실에 대한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서신을 쓰면서 로마서 1장 1절~17절이 로마서 서신의 서론이라면 본론을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가지고 나온 말씀이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왜 이 땅에 임했는가, 이 사실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1장 1절~17절에 복음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즐거운 소식이며 우리 모두에게 참된 축복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본론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 있다면 진노에 대한, 죄에 대한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나니 눈이 열린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죄악이 복음을 막는 자리에 서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가가 깨달아졌고 그 자리에 자신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지면서 정말로 이 복음의 역사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본문이 오늘 나와 있는 본문입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이미 로마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잘 믿는다고 소문났고 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고 그 소문이 이미 다른 지역에까지 날 정도로 믿는다고 하는 로마 교회에, 또 왜 다시 바울이 이 편지들 속에서 복음을 확인시키느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그 복음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특히 예배하는 가운데 오늘 말씀 받는 귀한 시간에, 특히 오늘 또 성찬 예식을 대하면서 잃어버렸던, 오늘 우리 장로님 기도하신 것처럼 처음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복음을 받을 때의 그 감사와 감격이 예배를 통해서, 성찬 예식을 통해서 회복되는 그런 축복의 시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진노아래 있는 인생
그러면 먼저 첫 번째, 진노 아래에 있는 인생이 어떠한 인생이었던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가 복음 받은 것이 모든 것이고 복음이 엄청난 하나님의 엄청난 모든 축복이 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에게 복음 속에서 눈이 열려야 할 부분이 있다면 진노 아래에 있는 인생입니다. 오늘 특히 로마서 1장 18절~32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지금도 계속 임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장 1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기 하늘로부터 나타나난다는 말은 진노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이 땅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의 역사가 어떤 역사들이냐? 오늘 29절부터 31절에 보면 구체적으로 그 진노의 역사들이 나오는데 한번 봅시다. 진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증상에 대한 부분인데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옛날 로마 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인데 29절~31절까지 우리 같이 한번 한 음성으로 읽어 봅시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러면서 32절에 보면, 제가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완전히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져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분별력이 없어진 상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노로 말미암은 지금 나타나는 이 땅의 모든 증상들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 가면 갈수록 세상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게 로마 시대 바울이 살던 그 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러분 앞에 펼쳐진 현장의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날마다 우리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을 받아보지 않습니까? 그 신문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다 들어 있는 것 아닙니까?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더더욱 진노 중의 진노, 형벌 중의 형벌이 있다면 그렇게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형벌 중의 형벌이요 진노 중의 진노인데 오늘 읽은 2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28절에 보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 현장에서 잃어나는 모든 진노에 대한 증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반면에 또한 더불어 그 상태를 그냥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아니하고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노 중의 진노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는데도 잘된다, 그게 진노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내 욕심대로, 우리 마음대로 무언가 하나님 없다면서 내 욕심대로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심판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잘되고 있다, 그게 오히려 더 큰 형벌이요 진노라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냥 놔두시느냐? 여러분, 중요한 것은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왜 쌓는지 아십니까? 어느 날 한꺼번에 터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한꺼번에 터뜨리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와 사건을 당합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많은 일을 당하고 때에 따라 건강이 좋지 않거나 또 원치 않은 불치병에 걸릴 수도 있고 또 사업도 어려워지고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 인간 관계가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 둡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기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알고도 그냥 놔두는 부모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앞마당에 보면 왜 여기 상원 고등학교 아이들이 와서 끌어안기도 하고 하여튼 보기 흉한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마당이 넓다 보니 와가지고 거기 앉아서 아이들이 끌어안기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여러분, 어른들이 지나가면서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지나가지 않습니까? 왜냐? 요즘 얼마나 악한 시대인지 잘못 말했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거의 다 눈길을 돌리고 나 몰라라 하면서 그냥 돌아갑니다. 그런데 만약에, 만약에 우리 교회 마당에서 우리 아들놈이 그런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 제가 가만 두겠습니까? 당장 멱살 잡고 들어와서 두드려 놔도 호되게 두드려 놓고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꾸지람할 것 아닙니까? 왜냐? 자녀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잠언서 3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2장 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라 했습니다. 친아들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그 길을 부모가 가만두고 볼 부모가 없지 않습니까? 분명히 자녀라면 꾸지람하게 되어 있고 바른 길로 인도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학교 사역하고 있는 사역자들 통해서 보고를 받습니다. 사실 우리 학교 아이들 특별히 중,고등학교 현장이 어떤 현장이냐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마는 저한테 어떤 사역자가 보고를 했어요. 목사님 38명 아이들 가운데 36명이 그대로 다 자고 수업시간에 1명은 오락기를 만지고 있고, 1명만 선생님이 가르치는 수업을 듣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선생님도 자존감이 다 무너져서 선생님들이 정신이 돌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런 학교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아무리 자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할지라도 만약 그 학생 중에 내 자녀가 있다면 그런 모습을 보고 가만 두겠습니까? 아니잖아요. 반드시 꾸지람 하고 징계를 하게 되어 있지요. 어떤 면에서 우리가 때로는 가난해서, 사업에 실패해서 또 질병에 대한 부분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부분들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눈을 열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참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면 가만 둡니다. 왜냐? 쌓아 놓는 거예요. 마지막 날에 터트리기 위해서 ...그런데 그런 모든 이 땅에 일어나는 일들이 왜 어떻게 일어났느냐? 그것은 지금 당장 일어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장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인데 이것은 이미 오래된 문제에서 나왔다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1:1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여기에 경건하지 않음이라는 말은 불경건이라는 말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불경건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자리를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내 마음에서 내 보내는 것을 가지고 불경건이라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 진노가 지금 우리가 보는 현장에 모든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3:5절에 있는 말씀처럼 주인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 땅에 진노가 지금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 했습니다. 그냥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신 것이 아니라 동산 중앙에 두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 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 나무를 쳐다보면서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만이 창조주이고 하나님이 이 내 주인이라는 사실을 자각 시키기 위해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었어요. 다 보도록... 날마다 그 사실을 보면서 아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각하기 위해서 동산 중앙에 다 보도록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었다라는 사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선악과를 저 안 보이는데에 숨겨놓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동산 중앙에 놓았어요. 그것을 바라보면서 내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인생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내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그리고 요즘은 선악과 따 먹는 정도가 아니라 뿌리조차 뽑아 먹어요. 그게 뭔지 아십니까 득도 한다는 내가 스스로 신이 된다는 그것이 선악과 뿌리채 뽑아먹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그 모든 것들이 바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것이 불경건이고 이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 눈 앞에 보이는 불신자 상태, 멸망 받는 상태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 후손의 문제, 정신의 문제, 육신의 문제, 우상숭배의 문제, 전부 어디에서 오느냐 결국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이 불경건 때문에...이것은 이미 오래된 문제예요. 그리고 또 롬1:29에 한 단어를 유의해서 보셔야 하는데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불의라는 말은 성경에서 불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한 가지 의미로만 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 그것을 가지고 불의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인간에게 칩을 넣어 주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칩을 넣어 주셨어요. 그런데 여러분 휴대폰에 칩이 뭐가 들어있느냐에 따라서 통화가 달라지잖아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므로 다른 칩이 심어지게 되었어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불의라는 말을 쓸 때는 한 가지 단어의 의미로 쓰였는데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할 때 불의라는 말을 썼어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 창세기3장의 원죄 문제, 주인을 상실한 이 문제 때문에 지금 우리 눈앞에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온갖 진노의 증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을 다른 각도로 말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결국 우상숭배하고 또 순리대로 살아가지 않고 역리대로 살아가고, 그리고 옳지 않는 것도 옳지 않는 이 일에 함께 하나 되어지는 이런 부분들을 성경은 쭈욱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이것이 전부다 결국 오래된 문제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이 부분들 때문에 온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생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 칩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몸부림은 마치 우리 집에 수도관에 물이 안 나와요. 꼭지를 틀면..그러면 물이 왜 안나올까 보니까 수도관이 막혀서 물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수도관을 뚫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수도관이 막힌 줄을 모르니까 수도꼭지만 자꾸 바꾸는 거예요. 그게 어떤 면에서 인생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진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몸부림치면서 열심을 내는데 수도꼭지만 바꾸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렇다.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되겠다 여러분 정말 교육이 잘못되어서 입니까? 교육을 제대로 시킨다고 시켰는데 똑똑한 만큼 더 해 먹습니다. 그것이 세상이예요. 심리가 잘못되어서 그렇다해서 교육심리학을 가지고 들어오기도 했어요. 그리고 종교를 가지고 들어오고, 여러 가지 선행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마치 수도파이프가 막힌 줄을 모르고 꼭지를 자꾸 바꾸는 것과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수도 파이프관이 막힌것이 해결됩니까? 안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데 이 땅에서는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그 길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는 그 진노아래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붙잡힌 인생이 되어진 거예요.
2. 하나님께 붙잡힌 인생
이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일방적으로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 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와 가로막혀있는 그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5: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할렐루야! 내가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열심히 잘 살 때가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할 때가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 증거를 보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자가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5:11절에 보면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고요,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어떻게 알게 되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세워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고 복음 앞에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요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아오시고 사망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했습니다. 에베소서1:13절에 보면 아예 성령으로 우리에게 도장 찍었어요. 너는 내 것이라 인치셨다 했어요. 요10:28~29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그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어요. 요10:28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9절에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그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다라고 말씀 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으로 도장찍었을 뿐만 아니라, 인 치셨을 뿐만 아니라 아예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벧전2:9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에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무슨 말입니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에게 도장 찍으셔서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그 손에서 아무도 빼앗아 갈 자가 없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성찬식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원래 진노아래 있었던 우리의 인생이었는데 진노와 상관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신분에 대한 확인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모든 저주 끝나고 승리자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 뭐냐? 그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승리자의 신분으로 승리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모든 저주에서 해방 받았습니다. 죽음에서 저주에서, 지옥에서 사단으로부터 죄에서부터 해방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저주에서 해방 시키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거기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는 시간이 성찬 예식을 통해서입니다. 특별히 이 성찬 예식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인데 주님이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죠.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는데 이것은 이제 헤어지니까 슬프니까 아쉬우니까 송별회를 하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최후의 만찬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최후의 만찬을 위한 잔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실 것을 미리 내다보고 제자들이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바울도 주의 식탁이라고, 주의 만찬이라고 성찬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승리한 그 축복에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승리한 자라는 나의 신분이 이제는 진노아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 구원에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고 맛보는 시간이 뭐냐? 그게 성찬식이에요. 옛날에 성찬식을 하면 징징 울고 분위기부터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눈물 흘려야 은혜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아예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성찬식은 그런게 아니라 복음을 알면 알수록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감격함으로 대하는 것이 어찌 진노아래 있어야 될 인생이었는데 하나님의 섭리를 그리스도로 맛볼 수 있는 그 축복된 자리에 나를 세우셨느냐? 그 사실을 감사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감사와 감격함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성찬 예식입니다. 주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성찬식에 우리 어르신들은 제가 어릴 때 봐도 그래요. 실수하거나 범죄를 했으면 성찬에 대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진짜 복음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실수하고 죄를 범하는 만큼 오히려 더 성찬에 임해야 됩니다. 왜냐?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신분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실수했기 때문에 우리가 성찬에 대하면서 내 신분이 어떤 것인가 회복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실수해도 범죄해도 더욱 더 진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의 신분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내게 주신 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성찬에 임해야 되는 부분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명령을 내립니다.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킬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여호수아서 6장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 앞에 광야 길을 걸어오면서 힘이 다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 할례를 행하라, 유월절을 지켜라. 되지도 않는 명령 같습니다.
여러분, 할례가 뭡니까? 할례는 남자의 성기 표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전쟁을 앞두고 있는 마당인데 할례를 행하게 되면 남자들이 움직일 수가 없어요. 칼을 가지고 전쟁연습을 해야 되는 시간표인데 할례를 행하라. 그런데 그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의 표는 “너는 내 것이다”는 표입니다. 그 명령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 앞에서 할례를 행했는데(사실 광야에서 난 모든 세대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심) 그때 여호수아서 5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났어요. 무슨 말입니까? 결국 우리가 신분을 확인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늘 군대를 동원하셔서 흑암의 세력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찬 예식이 그러한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분을 확인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흑암의 역사들이 무너지는 그런 축복의 응답의 시간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킬 것을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유월절은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지켰습니다.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지키지 못했는데 여리고성을 앞두고 유월절을 지킬 것을 말씀했습니다. 유월절은 양의 피를 뿌리고 무교병을 먹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광야 길을 가는 동안 곡식을 구할 수 없었으니까 유월절을 지킬 수가 없었죠. 그런데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은 이미 가나안 정복 이전에, 여리고가 무너지기 이전에 그 땅의 주인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 너희들것이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유월절을 지키게 되죠.
여러분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분만 확인하면 모든 흑암의 역사들이 우리 현장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고 참된 승리의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유월절 지킨 이 사건들, 할례를 행한 이 사건들을 다윗이 기억하고 시편 23편에 보면 시를 썼는데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에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셨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상은 시상하는 것이 아니라, 잔치상을 베풀어 주셨다는 말이에요. 아마 다윗은 여리고 성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할례와 유월절 그 사건을 머리에 두고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와 유월절을 행한 그 사건을 머리에 두고 고백을 한 시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잔치의 상을 차려주시고.. 여러분 이게 바로 성찬 예식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나 다윗이나 예수님 당시에는 미리 내다보고 행했다면, 우리는 더 확실한 틀림없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흑암의 역사들이 완전히 꺾여졌어요. 어떤 문제이든지 괜찮아요. 여러분 문제 앞에 도전하시고 질병 앞에 치유를 놓고 기도하시고 혹시 닫힌 문이 있다면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도전하세요. 모든 경제 산업에 닫힌 문들이 열려지도록, 혹여나 오랜 질병 가운데 어려움 당하는 분들 계신다면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도전하세요. 기도하세요. 이미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승리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눌려있지 마시고, 문제 앞에 눌려 있지 마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 축복의 비밀들을 성찬 예식을 통해 회복하고 확인하고 정말 우리 자신들의 신분이 어떤 신분인가를 확인하면 그때 현장에 역사하는 모든 흑암이 무너져 내리고 참된 축복의 응답의 문들이 열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진노 아래에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붙잡힌 인생,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는 자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신분만 확인하면 됩니다. 무엇을 통해서? 성찬예식을 통해서. 오늘 이 성찬예식을 통해서 우리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진노아래에 있던 인생이었는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망할 수없는 신분임을 확인하시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시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오늘 최고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축복의 시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5년 4월 26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
(롬1:18-32)
서론: 하나님의 사람은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 가운데,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에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이것을 누리지 못하면 삶과 현장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문을 닫고 성도들이 현장에서 힘을 잃는 것도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과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나의 상태는 어떤 상태였기에 구원이 전부인 것일까요?
1. 진노 아래 있는 인생
(1) 지금도 이 땅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됩니다. (18절)
1) 하나님의 진노로 말마암아 지금 우리의 현장에 나타나는 증상(29~31절)
2) 형벌 중의 형벌: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두신 가운데(24,26,28절) 영적인 분별력이 없게 됨(32절)
(2) 이러한 진노는 오래된 문제 때문입니다.
1) 불경건 : 하나님의 자리를 내가 차지고 있는 것 (창3:5 주인을 상실한 것)
2) 불의 :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끊어진 상태
(3) 그러나 택하신 자의 어려움이나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어려움 가운데 은혜와 손길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언약을 잡고 복음의 눈을 여는 기회가 됨
2)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징계를 하시고(잠3:12) 참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받게 하심(히12:8)
2. 하나님께 붙잡힌 인생
(1)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잡힌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1)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롬5:8), 영생을 주시고(요일5:11)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심(요5:24)
2) 성령으로 인치심으로(엡1:13), 아무도 뺏을 수 없고(요10:28-29) 엄청난 신분과 권세를 주심(벧전2:9)
(2) 성찬식은 승리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1) 구약시대(여리고성 앞에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킴)와 예수님(십자가 전의 만찬)은 승리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음
2)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을 알고, 성찬예식을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임
결론: 우리는 원래 진노 아래의 인생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주간
이 구원의 축복 가운데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 앞에 최고의 영광을 돌리시길 기도드립니다.
< 기 도 문 >
하나님 아버지,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인해 세상과 모든 만남을 살리는 축복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이 땅에 계속되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들을 보며,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게 하시고 모든 끊어진 관계가 회복되게 하옵소서. 은혜 주시고 일방적으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 한주간 승리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모든 현장에서 감사와 감격을 누리며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
(롬1:18~32)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1:18~32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그의 손이 그 일을 마치십니다! 오늘 성찬식 예배를 통해서 최고로 복음을 많이 누리는 가장 귀하고 복된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찬양대 찬송 부른 내용이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Amazing Grace’입니다. 이게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애창하고 있는 찬송 1위입니다. 제일 많이 불리고 있는 것이 오늘 찬송 불렀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죄악 가운데 영원히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신 그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늘 충만하게 넘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현장을 살리게 되고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야기를 하면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은 우리가 쉽게 던질 수 있는 말입니다만 정말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내게 정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가? 내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날마다 우리에게 있는가? 대부분의 삶 속에서 실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누리지 못하니까 삶에 지배당하고 현장에 지배당하고, 현장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정복당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그 무엇보다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핍박과 어려움과 문제들 앞에서도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현장을 정복해 나갔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지금 교회가 힘을 잃고 있고 성도들이 현장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고 성도들이 현장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데 그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니까 현장에서 무너지고 현장에서 복음이 부끄러운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회복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면 정말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 구원받기 이전에 내 상태가 어떤 상태였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내 상태가 어떤 상태였던가를 사실적으로 알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게 되어 있고, 사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그것이 전부라는, 신앙 생활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답이 내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눈을 열어서 꼭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봐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내 상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기 이전에 나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였는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 있다면 다른 부분에서도 있지만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8절~32절 이 말씀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내 상태가 어떤 상태였던가를 잘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나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 상태였던가를 다시 한 번 여러분이 영안을 열어서 보심으로 말미암아 오늘 성찬예식을 대할 때에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신 그 구원의 축복에 대한 은혜와 감사와 감격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로마서 1장 17절~18절에 지난주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러면서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하면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복음을 바울이 깨닫고 나니까, 이 복음의 역사를 깨닫고 나니까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눈이 열려졌는데 복음 받지 못하고 있을 때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였는지에 대한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그런 죄들이 가장 큰 죄라는 사실에 대한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서신을 쓰면서 로마서 1장 1절~17절이 로마서 서신의 서론이라면 본론을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가지고 나온 말씀이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왜 이 땅에 임했는가, 이 사실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1장 1절~17절에 복음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즐거운 소식이며 우리 모두에게 참된 축복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본론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 있다면 진노에 대한, 죄에 대한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나니 눈이 열린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죄악이 복음을 막는 자리에 서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가가 깨달아졌고 그 자리에 자신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지면서 정말로 이 복음의 역사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본문이 오늘 나와 있는 본문입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이미 로마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잘 믿는다고 소문났고 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고 그 소문이 이미 다른 지역에까지 날 정도로 믿는다고 하는 로마 교회에, 또 왜 다시 바울이 이 편지들 속에서 복음을 확인시키느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그 복음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특히 예배하는 가운데 오늘 말씀 받는 귀한 시간에, 특히 오늘 또 성찬 예식을 대하면서 잃어버렸던, 오늘 우리 장로님 기도하신 것처럼 처음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복음을 받을 때의 그 감사와 감격이 예배를 통해서, 성찬 예식을 통해서 회복되는 그런 축복의 시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진노아래 있는 인생
그러면 먼저 첫 번째, 진노 아래에 있는 인생이 어떠한 인생이었던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가 복음 받은 것이 모든 것이고 복음이 엄청난 하나님의 엄청난 모든 축복이 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에게 복음 속에서 눈이 열려야 할 부분이 있다면 진노 아래에 있는 인생입니다. 오늘 특히 로마서 1장 18절~32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지금도 계속 임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장 1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기 하늘로부터 나타나난다는 말은 진노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이 땅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의 역사가 어떤 역사들이냐? 오늘 29절부터 31절에 보면 구체적으로 그 진노의 역사들이 나오는데 한번 봅시다. 진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증상에 대한 부분인데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옛날 로마 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인데 29절~31절까지 우리 같이 한번 한 음성으로 읽어 봅시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러면서 32절에 보면, 제가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완전히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져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분별력이 없어진 상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노로 말미암은 지금 나타나는 이 땅의 모든 증상들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 가면 갈수록 세상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게 로마 시대 바울이 살던 그 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러분 앞에 펼쳐진 현장의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날마다 우리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을 받아보지 않습니까? 그 신문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다 들어 있는 것 아닙니까?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더더욱 진노 중의 진노, 형벌 중의 형벌이 있다면 그렇게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형벌 중의 형벌이요 진노 중의 진노인데 오늘 읽은 2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28절에 보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 현장에서 잃어나는 모든 진노에 대한 증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반면에 또한 더불어 그 상태를 그냥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아니하고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노 중의 진노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는데도 잘된다, 그게 진노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내 욕심대로, 우리 마음대로 무언가 하나님 없다면서 내 욕심대로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심판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잘되고 있다, 그게 오히려 더 큰 형벌이요 진노라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냥 놔두시느냐? 여러분, 중요한 것은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왜 쌓는지 아십니까? 어느 날 한꺼번에 터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한꺼번에 터뜨리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와 사건을 당합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많은 일을 당하고 때에 따라 건강이 좋지 않거나 또 원치 않은 불치병에 걸릴 수도 있고 또 사업도 어려워지고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 인간 관계가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 둡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기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알고도 그냥 놔두는 부모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앞마당에 보면 왜 여기 상원 고등학교 아이들이 와서 끌어안기도 하고 하여튼 보기 흉한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마당이 넓다 보니 와가지고 거기 앉아서 아이들이 끌어안기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여러분, 어른들이 지나가면서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지나가지 않습니까? 왜냐? 요즘 얼마나 악한 시대인지 잘못 말했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거의 다 눈길을 돌리고 나 몰라라 하면서 그냥 돌아갑니다. 그런데 만약에, 만약에 우리 교회 마당에서 우리 아들놈이 그런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 제가 가만 두겠습니까? 당장 멱살 잡고 들어와서 두드려 놔도 호되게 두드려 놓고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꾸지람할 것 아닙니까? 왜냐? 자녀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잠언서 3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2장 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라 했습니다. 친아들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그 길을 부모가 가만두고 볼 부모가 없지 않습니까? 분명히 자녀라면 꾸지람하게 되어 있고 바른 길로 인도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학교 사역하고 있는 사역자들 통해서 보고를 받습니다. 사실 우리 학교 아이들 특별히 중,고등학교 현장이 어떤 현장이냐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마는 저한테 어떤 사역자가 보고를 했어요. 목사님 38명 아이들 가운데 36명이 그대로 다 자고 수업시간에 1명은 오락기를 만지고 있고, 1명만 선생님이 가르치는 수업을 듣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선생님도 자존감이 다 무너져서 선생님들이 정신이 돌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런 학교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아무리 자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할지라도 만약 그 학생 중에 내 자녀가 있다면 그런 모습을 보고 가만 두겠습니까? 아니잖아요. 반드시 꾸지람 하고 징계를 하게 되어 있지요. 어떤 면에서 우리가 때로는 가난해서, 사업에 실패해서 또 질병에 대한 부분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부분들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눈을 열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참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면 가만 둡니다. 왜냐? 쌓아 놓는 거예요. 마지막 날에 터트리기 위해서 ...그런데 그런 모든 이 땅에 일어나는 일들이 왜 어떻게 일어났느냐? 그것은 지금 당장 일어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장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인데 이것은 이미 오래된 문제에서 나왔다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1:1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여기에 경건하지 않음이라는 말은 불경건이라는 말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불경건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자리를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내 마음에서 내 보내는 것을 가지고 불경건이라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 진노가 지금 우리가 보는 현장에 모든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3:5절에 있는 말씀처럼 주인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 땅에 진노가 지금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 했습니다. 그냥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신 것이 아니라 동산 중앙에 두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 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 나무를 쳐다보면서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만이 창조주이고 하나님이 이 내 주인이라는 사실을 자각 시키기 위해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었어요. 다 보도록... 날마다 그 사실을 보면서 아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각하기 위해서 동산 중앙에 다 보도록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었다라는 사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선악과를 저 안 보이는데에 숨겨놓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동산 중앙에 놓았어요. 그것을 바라보면서 내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인생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내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그리고 요즘은 선악과 따 먹는 정도가 아니라 뿌리조차 뽑아 먹어요. 그게 뭔지 아십니까 득도 한다는 내가 스스로 신이 된다는 그것이 선악과 뿌리채 뽑아먹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그 모든 것들이 바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것이 불경건이고 이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 눈 앞에 보이는 불신자 상태, 멸망 받는 상태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 후손의 문제, 정신의 문제, 육신의 문제, 우상숭배의 문제, 전부 어디에서 오느냐 결국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이 불경건 때문에...이것은 이미 오래된 문제예요. 그리고 또 롬1:29에 한 단어를 유의해서 보셔야 하는데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불의라는 말은 성경에서 불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한 가지 의미로만 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 그것을 가지고 불의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인간에게 칩을 넣어 주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칩을 넣어 주셨어요. 그런데 여러분 휴대폰에 칩이 뭐가 들어있느냐에 따라서 통화가 달라지잖아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므로 다른 칩이 심어지게 되었어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불의라는 말을 쓸 때는 한 가지 단어의 의미로 쓰였는데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할 때 불의라는 말을 썼어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 창세기3장의 원죄 문제, 주인을 상실한 이 문제 때문에 지금 우리 눈앞에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온갖 진노의 증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을 다른 각도로 말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결국 우상숭배하고 또 순리대로 살아가지 않고 역리대로 살아가고, 그리고 옳지 않는 것도 옳지 않는 이 일에 함께 하나 되어지는 이런 부분들을 성경은 쭈욱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이것이 전부다 결국 오래된 문제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이 부분들 때문에 온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생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 칩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몸부림은 마치 우리 집에 수도관에 물이 안 나와요. 꼭지를 틀면..그러면 물이 왜 안나올까 보니까 수도관이 막혀서 물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수도관을 뚫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수도관이 막힌 줄을 모르니까 수도꼭지만 자꾸 바꾸는 거예요. 그게 어떤 면에서 인생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진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몸부림치면서 열심을 내는데 수도꼭지만 바꾸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렇다.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되겠다 여러분 정말 교육이 잘못되어서 입니까? 교육을 제대로 시킨다고 시켰는데 똑똑한 만큼 더 해 먹습니다. 그것이 세상이예요. 심리가 잘못되어서 그렇다해서 교육심리학을 가지고 들어오기도 했어요. 그리고 종교를 가지고 들어오고, 여러 가지 선행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마치 수도파이프가 막힌 줄을 모르고 꼭지를 자꾸 바꾸는 것과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수도 파이프관이 막힌것이 해결됩니까? 안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데 이 땅에서는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그 길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는 그 진노아래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붙잡힌 인생이 되어진 거예요.
2. 하나님께 붙잡힌 인생
이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일방적으로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 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와 가로막혀있는 그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5: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할렐루야! 내가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열심히 잘 살 때가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할 때가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 증거를 보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자가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5:11절에 보면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고요,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어떻게 알게 되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세워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고 복음 앞에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요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아오시고 사망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했습니다. 에베소서1:13절에 보면 아예 성령으로 우리에게 도장 찍었어요. 너는 내 것이라 인치셨다 했어요. 요10:28~29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그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어요. 요10:28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9절에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그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다라고 말씀 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으로 도장찍었을 뿐만 아니라, 인 치셨을 뿐만 아니라 아예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벧전2:9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에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무슨 말입니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에게 도장 찍으셔서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그 손에서 아무도 빼앗아 갈 자가 없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성찬식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원래 진노아래 있었던 우리의 인생이었는데 진노와 상관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신분에 대한 확인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모든 저주 끝나고 승리자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 뭐냐? 그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승리자의 신분으로 승리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모든 저주에서 해방 받았습니다. 죽음에서 저주에서, 지옥에서 사단으로부터 죄에서부터 해방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저주에서 해방 시키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거기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는 시간이 성찬 예식을 통해서입니다. 특별히 이 성찬 예식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인데 주님이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죠.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는데 이것은 이제 헤어지니까 슬프니까 아쉬우니까 송별회를 하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최후의 만찬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최후의 만찬을 위한 잔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실 것을 미리 내다보고 제자들이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바울도 주의 식탁이라고, 주의 만찬이라고 성찬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승리한 그 축복에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승리한 자라는 나의 신분이 이제는 진노아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 구원에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고 맛보는 시간이 뭐냐? 그게 성찬식이에요. 옛날에 성찬식을 하면 징징 울고 분위기부터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눈물 흘려야 은혜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아예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성찬식은 그런게 아니라 복음을 알면 알수록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감격함으로 대하는 것이 어찌 진노아래 있어야 될 인생이었는데 하나님의 섭리를 그리스도로 맛볼 수 있는 그 축복된 자리에 나를 세우셨느냐? 그 사실을 감사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감사와 감격함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성찬 예식입니다. 주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성찬식에 우리 어르신들은 제가 어릴 때 봐도 그래요. 실수하거나 범죄를 했으면 성찬에 대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진짜 복음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실수하고 죄를 범하는 만큼 오히려 더 성찬에 임해야 됩니다. 왜냐?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신분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실수했기 때문에 우리가 성찬에 대하면서 내 신분이 어떤 것인가 회복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실수해도 범죄해도 더욱 더 진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의 신분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내게 주신 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성찬에 임해야 되는 부분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명령을 내립니다.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킬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여호수아서 6장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 앞에 광야 길을 걸어오면서 힘이 다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 할례를 행하라, 유월절을 지켜라. 되지도 않는 명령 같습니다.
여러분, 할례가 뭡니까? 할례는 남자의 성기 표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전쟁을 앞두고 있는 마당인데 할례를 행하게 되면 남자들이 움직일 수가 없어요. 칼을 가지고 전쟁연습을 해야 되는 시간표인데 할례를 행하라. 그런데 그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의 표는 “너는 내 것이다”는 표입니다. 그 명령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 앞에서 할례를 행했는데(사실 광야에서 난 모든 세대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심) 그때 여호수아서 5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났어요. 무슨 말입니까? 결국 우리가 신분을 확인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늘 군대를 동원하셔서 흑암의 세력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찬 예식이 그러한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분을 확인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흑암의 역사들이 무너지는 그런 축복의 응답의 시간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킬 것을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유월절은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지켰습니다.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지키지 못했는데 여리고성을 앞두고 유월절을 지킬 것을 말씀했습니다. 유월절은 양의 피를 뿌리고 무교병을 먹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광야 길을 가는 동안 곡식을 구할 수 없었으니까 유월절을 지킬 수가 없었죠. 그런데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은 이미 가나안 정복 이전에, 여리고가 무너지기 이전에 그 땅의 주인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 너희들것이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유월절을 지키게 되죠.
여러분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분만 확인하면 모든 흑암의 역사들이 우리 현장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고 참된 승리의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유월절 지킨 이 사건들, 할례를 행한 이 사건들을 다윗이 기억하고 시편 23편에 보면 시를 썼는데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에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셨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상은 시상하는 것이 아니라, 잔치상을 베풀어 주셨다는 말이에요. 아마 다윗은 여리고 성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할례와 유월절 그 사건을 머리에 두고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와 유월절을 행한 그 사건을 머리에 두고 고백을 한 시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잔치의 상을 차려주시고.. 여러분 이게 바로 성찬 예식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나 다윗이나 예수님 당시에는 미리 내다보고 행했다면, 우리는 더 확실한 틀림없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흑암의 역사들이 완전히 꺾여졌어요. 어떤 문제이든지 괜찮아요. 여러분 문제 앞에 도전하시고 질병 앞에 치유를 놓고 기도하시고 혹시 닫힌 문이 있다면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도전하세요. 모든 경제 산업에 닫힌 문들이 열려지도록, 혹여나 오랜 질병 가운데 어려움 당하는 분들 계신다면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도전하세요. 기도하세요. 이미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승리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눌려있지 마시고, 문제 앞에 눌려 있지 마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 축복의 비밀들을 성찬 예식을 통해 회복하고 확인하고 정말 우리 자신들의 신분이 어떤 신분인가를 확인하면 그때 현장에 역사하는 모든 흑암이 무너져 내리고 참된 축복의 응답의 문들이 열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진노 아래에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붙잡힌 인생,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는 자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신분만 확인하면 됩니다. 무엇을 통해서? 성찬예식을 통해서. 오늘 이 성찬예식을 통해서 우리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진노아래에 있던 인생이었는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망할 수없는 신분임을 확인하시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시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오늘 최고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축복의 시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5년 4월 26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
(롬1:18-32)
서론: 하나님의 사람은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 가운데,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에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이것을 누리지 못하면 삶과 현장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문을 닫고 성도들이 현장에서 힘을 잃는 것도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과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나의 상태는 어떤 상태였기에 구원이 전부인 것일까요?
1. 진노 아래 있는 인생
(1) 지금도 이 땅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됩니다. (18절)
1) 하나님의 진노로 말마암아 지금 우리의 현장에 나타나는 증상(29~31절)
2) 형벌 중의 형벌: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두신 가운데(24,26,28절) 영적인 분별력이 없게 됨(32절)
(2) 이러한 진노는 오래된 문제 때문입니다.
1) 불경건 : 하나님의 자리를 내가 차지고 있는 것 (창3:5 주인을 상실한 것)
2) 불의 :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끊어진 상태
(3) 그러나 택하신 자의 어려움이나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어려움 가운데 은혜와 손길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언약을 잡고 복음의 눈을 여는 기회가 됨
2)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징계를 하시고(잠3:12) 참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받게 하심(히12:8)
2. 하나님께 붙잡힌 인생
(1)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잡힌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1)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롬5:8), 영생을 주시고(요일5:11)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심(요5:24)
2) 성령으로 인치심으로(엡1:13), 아무도 뺏을 수 없고(요10:28-29) 엄청난 신분과 권세를 주심(벧전2:9)
(2) 성찬식은 승리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1) 구약시대(여리고성 앞에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킴)와 예수님(십자가 전의 만찬)은 승리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음
2)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을 알고, 성찬예식을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임
결론: 우리는 원래 진노 아래의 인생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주간
이 구원의 축복 가운데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 앞에 최고의 영광을 돌리시길 기도드립니다.
< 기 도 문 >
하나님 아버지,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인해 세상과 모든 만남을 살리는 축복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이 땅에 계속되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들을 보며,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게 하시고 모든 끊어진 관계가 회복되게 하옵소서. 은혜 주시고 일방적으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 한주간 승리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모든 현장에서 감사와 감격을 누리며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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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4 | 언약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계시는 하나님 | 단3:8-18 | 2024-12-15 | |
1463 | 손대지 아니한 돌 | 단2:25-35 | 2024-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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