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2017-04-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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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창13:14~18)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 창13:14~18

■ 할렐루야 !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십시다. 오늘 우리 입교, 유아세례, 세례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찬양대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 이 자리가 되는지 정말 마음에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정말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보좌에 앉으신 그 하나님의 은혜 그 속에 오늘 한분 한분이 신앙의 고백들을 하게 되고 세례를 받았는데 이분들 위해서 여러분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고 이분들이 교회 안에서 참된 복음에 깊은 뿌리를 내려서 정말 이 한 시대의 재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도자들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세례 받은 분들 가운데는 근 한 30년동안 천주교 다니다가 또 정말로 길이 어디 있는가 이리저리 찾다가 우리교회 집사님을 만나서 복음을 받게 되었고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분들도 있고, 또 대학현장에서 예수 믿어야 될 이유를 듣고 나서 복음, 이 그리스도를 받게 되고 그러면서 정말로 자녀에게는 이 예수님에 대한 언약을 바르게 전달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유아세례 받는 분들도 있고, 각기 나름대로 현장에서 응답받다가 입교 받고 유아세례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분들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정말로 천군천사를 동원하셔서 오늘 이 분들 향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그 어린양께 있도다. 이게 천사들의 찬송으로 들려지는 귀중한 은혜를 입게 된 것을 감사를 드리고 특별히 오늘도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우리가 구원 받은 이 축복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치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라는 말은 세례를 받는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여지게 되지요. 그래서 특별히 오늘 세례 받고, 또 유아세례 받고 입교 받은 분들 특별히 세례 받은 분들 기억하실 것은 지금까지는 내 삶을 내 생각과 내 계획을 가지고 내가 주인되어서 살아왔지만은 그러나 이제부터 나의 주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근본을 바꾸는 것이 세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바 되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고 나의 주인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는 물세례라고 해서 그냥 물을 가지고 머리에 얹어서 세례식을 합니다만 침례교에서는 아예 물에 흠뻑 빠뜨립니다. 나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게 좀 더 실감나지 않겠나 생각을 합니다. 물에 완전히 빠뜨려서 나오게 될 때 아, 내가 죽었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살아났구나하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든 저렇든 상관은 없습니다. 물을 적게 뿌리든 흠뻑 뿌리든 우리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 받게 될 때 그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고 우리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게 됩니다. 주인됨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왔든지간에 세례 받는 모든 분들이 지금부터는 나의 삶의 방법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를 두고 우리가 세례를 받고 입교를 받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이제부터 나의 모든 삶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겠습니다 하는 고백을 갖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삶에 대한 부분은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잘 살았다 할지라도, 속된 말로 잘 나갔다 할지라도 여러분, 그것은 여러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삶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결국은 짐만 지게 되고 고생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29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게 되면 주님 주시는 참된 쉼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모르게 신앙생활하면서도 그것이 짐이 되고 신앙 생활이 고생이 된다면 옛삶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 옛삶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짐이 되고 고생이 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게 될 때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11장 29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 너는 “내게 배우라”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 사는 방법을 다시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복음을 알고 세상을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내게 배우라.” 세상 사는 방법을 다시 새롭게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고 세상을 봐야 세상을 정확하게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 문제, 영적인 문제들 가운데 보이지 않게 지금도 실패의 역사가 이 땅에 진행되고 있고 우리도 그 가운데서 태어났고 그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복음이 아니고서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주신 것이 복음입니다. 왜 복음을 주셨느냐? 먼저 첫 번째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 다시 말하면 신분을 바꾸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느냐? 하나님과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신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누리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가지고 있지만 복음을 누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현장에 재앙이 일어나고 복음을 가지고 있지만 복음을 누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불신자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느냐? 복음을 가지고 신분을 바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조차도 하나님과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누리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을 누리면서 살게 될 때 미래를 살리게 되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은 모든 축복을 쏟아 부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 종교 생활하는 사람이나 불신자와 똑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에 대한 부분들입니다만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렇다면 정말로 복음을 가진 자의 삶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찾아냄으로 말미암아 오늘 이 자리에 앉은 모든 성도님들, 또 오늘 세례 받고 유아세례 받고 입교 받는 모든 분들이 진짜 복음을 누리는 그 삶 속에 들어가는 축복된 응답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방법
먼저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법 말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구원 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역사하시느냐? 여러분, 우리의 모든 불신앙을 버리고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할 때, 그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와 사건 속에서 불신앙을 버리고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게 될 때, 하나님은 그 때 즉각적으로 역사하시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 왕 잘 아시지요? 앗수르 왕 산헤립이 군사들을 동원해서 히스기야 왕을 공격해왔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아니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기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러나 열왕기하 19장 35절에 보면 이 히스기야 왕이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에 그 밤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동원하셔서 18만 5천을 송장으로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순간순간 우리의 신앙의 고백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사실, 늘 우리가 신앙 고백을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만 그렇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지 못한다 할지라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살다가 한 번 하나님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그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만 거의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자신 나름대로 살아가다가도 하나님 바라보면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신앙 생활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우리 안에 무언가 있으면 그것을 의지하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내 자신에게 무언가 있으면 그것을 붙잡고 있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삶의 방법이 있는데 그 사실을 다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에 보면 바울이 복음 전하는 사역으로 인해서 엄청난 핍박과 환난을 당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핍박과 환난을 당했느냐? 바울의 고백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했습니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는 자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제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아, 내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는 것같이 처하게 된 이 사실은 내 안에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죽었다가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기 위함이구나,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이게 바울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안 믿고 있고 내 안에 무언가가 있으면 자그마한 것이라도 그것을 붙잡지 하나님을 안 바라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불신앙이 무너지고 진짜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런 참된 신앙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서 1장에 보면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의 재물을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 16절~18절에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사실은 풀무불 가운데 들어가는 위기를 당했습니다. 다니엘서 6장에도 보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이 만든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절하지 않게 된다면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기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이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박사와 술객보다 열 배 뛰어난 지혜를 그들에게 주셨고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만 머리카락 하나 그슬리지 않게 완벽하게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고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만 사자가 다니엘을 잡아먹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사자 입을 막으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법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신앙 생활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말씀했는데 빌립보 4장 6절~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여러분, 우리가 염려한다는 말은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또 염려한다는 말은 그만큼 내 생각과 내 계획이 가득차 있다는 말입니다. 진짜 내 생각과 내 계획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답이 내려지면 하나님이 하실 일들이 보이기 때문에 염려하라 해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내 계획이 너무 가득차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내 생각과 내 계획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 속에서 염려거리가 더 많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러면 응답을 주시는데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과 생각에 응답을 주신다 말씀했습니다.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 사실은 창세기 13장 14절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아브라함이 롯을 내보내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이전까지는 아브라함이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동안에는 늘 문제 투성이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형이 죽게 되고 하란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죽게 되고, 가나안 땅에 가라했는데 하란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죽게 되고 가나안 땅에 마침 들어갔는데 거기서 기근을 당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기도하면 될 것인데 기근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고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거의 죽게 되고, 그러면서 또 다시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되면서 또 창세기 13장 앞부분에 보면 데리고 나온 조카 롯 때문에 계속해서 가정에 다툼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무언가 되는 일이 없는, 계속적인 문제 투성이로, 이렇게 지내온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생애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생각들을 가지고 인도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기 생각들을 가지고 인도받아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불신앙을 내버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이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읽진 않았습니다만 3절, 4절에 보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기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람이 모든 앞에서 공식적으로 크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선포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언약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답이 있단 말입니다. 이 답을 가지고 아브라함은 문제를 당했습니다. 가정에 롯의 자녀들과 롯의 양을 치는 사람들과 아브라함의 양을 치는 사람들이 다투는 문제를 당했습니다. 이미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요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 롯을 불러서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할 테니까 네가 좋은 땅을 가지고 가라. 양보한 것처럼 보이지요?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신앙 생활은 양보해야 하고 배려해야 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 신앙 생활은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왜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느냐? 아브라함은 먼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이라는.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가나안 땅을 내 것으로 붙잡고 있으니까 네가 나머지 알아서 가지고 가라는 말입니다. 조건과 환경을 따지지 않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 가나안 땅이라는 그 언약을 붙잡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서 실수하고 실패하느냐? 문제와 사건을 당하면 그 환경 속에 속고 그 환경을 따라가고 환경을 붙잡지 않습니까? 현실을 붙잡고 사람을 따라가며 사람을 붙잡습니다. 거기서 실패합니다. 여러분,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불신앙과 싸워야 합니다, 사실은. 여러분, 이 자리에 50년 살아오신 분, 50년 동안 세상의 것으로 각인되고 뿌리내리고 체질된 것 있습니다. 60년 살아왔다는 60년 동안, 70년 살아왔다면 70년 동안 나름대로 복음 아닌 다른 것으로 각인되고 뿌리내리고 체질된 것이 있습니다. 그게 결국은 세상의 것이고 불신앙의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역사로 바뀌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 모든 불신앙이 바뀌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축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아브라함이 자기 생각과 자기 계획과 불신앙을 내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때 바로 이어서 축복을 선언하셨는데 15절에 무어라고 말씀했습니까?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된 역사는 무너지지 않는 산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면서 16절에 보면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무슨 말입니까? 후대와 가문을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조건 없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조건 없는 약속은 없습니다. 자그마한 것이라도 조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조건 없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재앙 가운데, 지옥 배경 가운데, 사단의 운명 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조건 없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사 그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대신 값을 치르시고 대속물이 되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조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값없이 우리가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조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그 축복이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래서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했지 않습니까?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멸망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그 어떤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조건 없이 우리의 근본 문제, 영적인 문제, 또 살아가면서 짓는 자범죄, 모든 죄의 문제들, 완전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하시고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이 축복 가운데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 약속을 주시고 축복하실 수 있는 분인데, 그래서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 봤지 않습니까?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은 우리를 일방적으로 자녀 삼으시고 어떤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느냐? 세계를 살리는 세계복음화의 축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 붙잡고 나아가면 됩니다. 어렵습니까? 힘듭니까? 모두가 어렵고 힘듭니다. 넘어지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에게 주신 세계복음화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 가지고 우리는 또 일어서고 또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축복된 응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다
두 번째입니다. 약속을 잡고 선택한 아브라함에게 주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이 주신 이 약속을 붙잡고 아브라함은 다른 것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13장 18절에 보면 단을 쌓았습니다. 단을 쌓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 십자가의 그 보혈의 능력을 붙잡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단을 쌓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느냐? 우리가 읽진 않았습니다만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가병 318명을 키우고, 또 연합군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축복도 주셨고 걸음걸음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너지지 않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영적인 선택을 한 아브라함에게. 반대로 롯은 그 당시에 눈앞에 보이는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땅이냐?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 했습니다. 애굽 땅과 같았더라 했습니다. 너무나 풍부한 땅을 이 롯이 선택했습니다. 그것도 영적인 사실은 전혀 관여하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했습니다. 영적인 사실을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사실을 제쳐 놓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어디 있습니까? 오늘 읽지 않았습니다만 13장 13절에 보면,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망하기 직전까지 간 소돔 사람들인데 그 영적인 사실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소돔 땅을 택한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그 차이는 분명히 알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 롯과 상관 없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상관 없이 일어난 전쟁인데 단을 쌓았던 아브라함에게는, 그게 축복으로 와졌습니다. 가병 318명, 또 오히려 그 전쟁에 나가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돌아오는 길에 소돔 왕이 제안을 했지 않습니까? 사람은 내게 보내고 전리품을 네가 가져가라. 그 때 아브라함이 무어라 했습니까? 나는 실오라기 하나도 가져가지 않겠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축복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았던, 무너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비록 손해 본다 할지라도 영적인 선택을 하게 될 때, 복음의 선택을 하게 될 때 여러분의 산업과 만남에 무너지지 않는 축복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중심으로 선택한 롯, 자기와 상관 없이 오게 된 전쟁인데 자기가 사랑하는 그것 때문에 포로되었습니다. 전쟁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것 때문에 전쟁의 포로로 끌려가서 결국 그 전쟁에서 포로로 아브라함에게 구출 당하지만 나중에 한번 보십시오. 19장을 보면 롯의 가문이 완전히 망하는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는 그 상황 속에서 겨우 탈출해오다가 아예 롯의 사위들은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영적인 상태가 무너진 것입니다. 농담으로 여겼고 탈출해오는 가운데 자기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아이들은 다 죽고 딸 둘만 남았는데 그 딸 둘도 결국은 롯이 잠자는 사이에 들어가서 관계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지만 삶이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삶이 되니 결국은 실패하는, 이런 결과를 가져온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허무한 것이 아닌데, 세상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닌데 롯은 복음은 받았지만,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자신도 망하고 그 시대도 실패하게 된 것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있는 순간순간의 신앙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종교적인 선택을 하고 불신앙의 고백을 하면 당장 망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망하면서 결국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하게 될 때 당장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특별히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선택, 신앙의 선택을 하느냐?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을 쌓는 것, 다시 말하면 복음의 말씀이 충만한 가운데서 올바른 선택과 올바른 판단을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영적인 은혜 받는 일에,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오늘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우리는 환경이 나쁘던 좋던 상관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모든 축복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우선순위를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일에 두게 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 다른 것 정리해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이 부분 해결하고 믿겠습니다. 또 우선 이것을 모면해야 하니까 이거 해결하고 어떻게 하겠습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은혜 구하고 은혜부터 있게 되면 판단과 선택도 하나님이 바르게 하게 하시고 그 때부터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바르게 정리해 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가운데 단을 쌓았더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날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회복하는 시간 되시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는 시간 되시고 예배 시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는 단이 되시고 하나님의 계획이 내 것이 되는 예배 시간됨으로 말미암아 한 시대를 살리는 주역으로 쓰임 받는 귀한 축복된 응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복음을 알고 복음을 누림으로 한 시대를 살리는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까지 우리의 삶을 사는 삶 그대로 살아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정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시고 주님께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시고 또 하나님과 함께 삶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의 노예가 아니라 불신 현장까지도, 재앙 현장까지도 살리는 증인 되도록 주님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 일에 우리 하나교회 모든 성도들 마므레 상수리 수풀의 단이 회복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017년 4월 9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내가 그것을 네가 주리라
(창13:14-18)


서론: 우리의 신분은 나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나의 모든 삶의 방법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옛 방식의 삶은, 살면 살수록 짐과 고생이 더해지게 되어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 주님께서는 참 평안을 주시며 세상사는 방법을 주님께 다시 배우라고 했습니다(마11:29). 그러기에 복음을 알게 된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문제, 영적인 문제가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신분을 바꾸고(하나님의 자녀), 다음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임마누엘의 축복). 하나님께선 미래를 살리고 모든 축복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으로 사는 삶의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방식
가. 불신앙을 버려라!
1) 우리는 복음 외에 의지할 것이 조금만 있어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존재임
2) 하나님께선 우리가 바라보는 순간 역사하심: 히스기야왕(왕하19:35) 바울(고후1:8-9, 빌4:6-7), 다니엘(단3,6장)
나. 언약을 붙잡아라!
1)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와 계속 고생했으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3~4절) 롯을 떠나보냄
2) 세상의 것으로 각인 뿌리 체질된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라!
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려라!
1) 하나님께선 무너지지 않는 산업의 역사(14), 후대와 가문을 축복(16), 조건 없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심(17)
2) 세계를 살리는 이미 축복을 주셨기에, 잠시 넘어지고 실패해도 또다시 약속 붙잡고 일어서서 나가라!

2.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다
가.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
1) 단을 쌓은 아브라함은(창13:18) 모든 만남과 사업에 무너지지 않는 축복을 받음
2) 육신적으로만 좋은 땅을 선택한 롯은, 자신과 상관없이 일어난 전쟁과 소돔 땅의 멸망으로 완전히 실패함
나. 영적인 단을 쌓아라!
1) 우리가 복음의 말씀이 충만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선 올바른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심
2) 우리의 우선순위를 영적으로 은혜 받는 일에 최우선으로 할 때,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리해주심


결론: 우리는 복음의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가운데, 영적인 선택을 먼저하면 됩니다. 주님께 나아감으로 하나님 자녀의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불신자들의 노예가 아니라 그들의 현장을 살리시길 바랍니다. 한주간 영적인 단을 회복함으로 올바른 선택과 결단이 시작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기도제목
● 말씀실현(실천사항)
● 전도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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