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2011-06-26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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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6일 주일2부 주일예배 신봉준 목사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출애굽기 33장 7~16절)
7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12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Exodus 33:7~16
■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전도자의 삶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지난주 화요일에는 다락방 전도총회에서는 가장 축복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개혁측에 영입되어짐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도로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세워지게 된 축복을 지난 화요일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격스러운 자리였고 참석한 분 모두가 순서마다 박수를 치고 울먹이며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복음만 증거하기 위해서 주의 종들부터 시작해서 교회 성도들이 하나되어 달려왔는데 하나님께서 응답을 통해 새롭게 한국교회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봅니다. 예배에 참여하지 못한 분들이 조금이나마 그 감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인터넷 웹사이트 RUTC 방송국 메인 화면 우측편에 ‘영입감사예배’ 라는 배너가 있습니다. 예배 전체 실황들을 메시지와 함께 시청할 수 있도록 조치되어 있습니다. 정말 앞으로 어렵고 힘든 부분들이 없지 않아 남아있지만 참 복음가지고 교회를 섬기며 현장의 우상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이 기도해주시고 우리교회가 이 일에 축복 누리는 교회로 개개인들에게 실제적인 증거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고 기도하면서 응답받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목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왕과 군인들로 온 애굽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조금씩 단절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대국 이집트의 노예로 들어갔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요셉에 의해 그의 아버지인 야곱이 그의 일족 75명을 데리고 이민을 가게 된 것입니다. 특급 케이스로 이민을 가게 된 사례여서, 아마 그 당시 최고 좋은 땅을 얻어 오늘날로 이야기 한다면 청와대나 백악관 근처에 땅을 얻어 그곳에서 야곱 일족 75명이 함께 살며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요셉이 그 나라의 국가적 경제위기를 극복하게 되고 애굽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여지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로 왕이 가만히 보니 자칫 잘못하면 강성해지는 이스라엘 민족들로 인해 애굽이 힘을 잃어 애굽백성이 도리어 노예될 수도 있겠다는 계산 하에 ‘이렇게 놔두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애굽의 바로 왕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독자를 세워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예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노예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되니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노예생활 가운데 한 지도자 모세를 세워 애굽에서 출애굽 시키는 사건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나와 광야 길 가는 동안에 지도자 모세가 잠시 산에 기도하러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현장을 놓고 모세가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를 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가르쳐서 내 백성이 이런 죄를 범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이름을 생명록에서 지우는 일이 있더라도 이 일을 막겠습니다” 라는 간절한 기도가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나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출애굽기 3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 그러면서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리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도록 하겠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흑암이 꺾여지고 다 살게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게 되면 여러분과 관계된 모든 현장에 흑암이 꺾여지고 다 살아나는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예배가 ‘내 생애 최고의 예배가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시고 오늘 최고로 은혜입어 한 주간의 모든 흑암이 꺾여지고 모든 축복의 문들이 열려지는 축복의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32장에 이어 33장 12절부터 보면, 모세의 중보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나오게 됩니다. 32장에도 보면 모세의 중보기도가 나오지만 33장 12~13절에도 마찬가지로 등장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하나님의 종 모세가 그의 나라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 내용이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는데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아멘. 이러한 응답을 받게 되고 이런 응답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증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15~16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또 다시 모세가 자기 백성을 위해 증표를 요구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또 응답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아멘.
오늘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갔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는 말씀을 듣고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새로운 은혜와 응답 그리고 새로운 말씀도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여호와께 나아오라’ 그래서 오늘 7절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이 본문을 가지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에 여호와를 앙모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기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말과 앙모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에서 이 본문을 설명할 수 있다면,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란 말씀은 단순히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만을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며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않는 새 힘을 어떤 자에게 주십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말씀했습니다.
시편 81편에 13절에 보면 그때 하나님이 14절에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손을 들어 원수와 대적을 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하면 모든 문제 해결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의 많은 경우,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하나님만 간절히 찾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게 될 것인데, 거의 터무니없는 말들에 속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상담을 요청해왔습니다. 다른 교회 집사님이신데 “목사님,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어서 목사님께 상담을 요청합니다” 제가 “집사님 교회 담임목사님이 계시지 않으시냐?”고 질문했더니 “우리교회 목사님께는 말씀드릴 수가 없다” 하시기에 그래서 제가 그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용인즉, 사실 있지도 않은 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말들과 상황 때문에 이상한 입장으로 곤란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낯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움에 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이 공격해 오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힘들고 어렵습니다”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생애동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지 않습니까?” 제가 그 분의 삶에 대해 들었기에 알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려웠던 가정의 문제도, 자녀의 문제도, 사업의 문제도 하나님의 은혜입고 하나님이 해결해주신 것 아닙니까? 대꾸하면 똑같은 수준이 되니까 전혀 대꾸하지 말고 하나님이 과거에 나를 인도하신 부분이 확실하다면 이 문제 속에서도 인도하실 줄로 믿는 믿음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라고 권면하고는 시편 35편 1절의 다윗의 기도를 전달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다윗이 이런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를 알려드렸습니다. 얼마 지난 후 이분이 감사하다며 정말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음의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결하려하면 물론 해결될 수는 있겠죠. 그러나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손 보셔야 완전하게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터무니없는 말 때문에 시험받고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 성도들이 서로 마음의 중심을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 그것은 아니거든요. 내게 있는 문제와 어려움들을 함께 놓고 기도하며 함께 힘이 되어지고 함께 영적인 싸움을 싸워주는 것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축복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듣기에도 “말이 많은 사람들이라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말하기 싫다” 라는 경우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되는지 아십니까? 교회가 성령충만 하지 아니하면, 말에 악한 사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격해와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그래서 정말 하나되지 못하게 하며 복음의 역사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성령충만함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고 말로 인한 악한 사탄의 시험에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나 귀중하게 축복받은 존재인데 교회 안에서 많은 갈등들, 불신앙들, 말들 때문에 우리 영혼을 사탄에게 내동댕이쳐 져버린다면 그것은 속는 것이며 죽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이런 저런 상처와 분노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정말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지는 그 축복이 교회 안에서부터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1. 우리는 왜 여호와를 앙모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그러면, 오늘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라고 제목을 삼았는데 우리가 왜 여호와를 앙모하고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왜 주님 앞에 서야 하느냐? 이유는 이 땅의 모든 것은 다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이 변하지 않고 말씀 주시는 하나님이 변하지 않기에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중심을 내놓고 기도할 수 있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이사야40:8)’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 변합니다. 이 땅의 모든 것 다 지나가고 다 변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상담해오면 이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목사님만 알고 계세요” 그러면 저는 “그런 제게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만 알 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입이 가벼워서 저만 알 수 없어요. 무엇을 말씀드리고자 하느냐? 우리는 진실을 그냥 받아들일 수 없어요. 거의 다 자기 입장에서 듣고 말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들도 거의 다 자기 입장에서 듣고 말하고 합니다. 다 변합니다. 그래서 시편 146편 3절에 보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변합니다. 그리고 저는 왜 “목사님만 알고 계십시오” 라는 말을 듣기를 싫어하는지 아십니까? 저도 때로는 믿음이 흐트러질 때, 그 말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혹이나 그분이 다른 문제와 사건 생기면 그것 때문에 “저 말은 내게 하는 말이다”라고 오해해서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놓치고는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데 그러면 죽는 것과 일반입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대상은 그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어떤 문제가 있든 지간에 하나님 앞에는 다 아뢰십시오. 여러분의 중심을 그대로 받으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은 풀과 같고 꽃과 같아서 변하지만, 우리 하나님은‘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이사야40장 8절)’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말씀하시는 그 분은 영원히 말씀을 성취 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께 여러분의 모든 것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마자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구약의 모든 인물들이 그 언약 붙잡고 응답받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신약의 그리스도를 깨달은 자들을 통해서 시대의 역사를 이끌어가셨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에게 응답하시고 축복하시느냐? 영원한 언약인 그 핵심인 언약을 붙잡은 자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그 약속을 성취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만을 앙모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져 나왔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언약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심심하면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낸 나 여호와니라"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언약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 그 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도 그들이 잡은 언약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 어느 정도로 이 언약을 확실히 붙잡았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고향 땅을 떠나 온 이민 1세대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죽을 날이 가까우면 고향이 그리워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묘를 가나안 땅 세겜에 썼습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산 땅 가나안 땅 세겜입니다. 거기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살 수 있을 만큼 큰 땅입니다. 바로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크기의 땅입니다. 거기를 돈 주고 사서 아브라함이 장사되었고 아내 사라도 거기에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이삭)도 거기에 장사되었고 그의 손자인 야곱도 가나안 땅에 장사 되었습니다. 죽자마자 요셉이 야곱의 시신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장사 지내고 돌아왔죠. 그런데 요셉은 자기를 이 땅에 묻고 4백년 후에 자기의 해골을 가나안 땅으로 가지고 갈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백 년 동안 종살이 할 것인데 만약에 요셉의 해골이 가나안 땅에 묻어져 있다면, 후대들이 일어나면서 4백년간 종살이 하는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후대들이 가나안 땅의 언약을 잊어버릴 것이 아닌가! 라는 언약적 중심이 있었기에 요셉은 자기의 뼈를 먼 훗날 가나안 땅에 돌아갈 때 자기의 해골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묻을 것을 당부 하였습니다. 그들 중심에는 '가나안 땅' 이라는 이 언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요셉은 4백 년 후에 자기 시체를 가지고 가라는 말이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4백 년 동안 애굽에 살면서 언약을 놓치고 잊어버릴까봐… 그 중심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고 그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언약을 주신 하나님만 앙모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앞에서 다 좋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미가서 7장 5절에 보면,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품 안에 있는 아내에게 조차도 입을 지키라고 합니다. 정말 언약되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답을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왜 여호와를 앙모해야 하느냐?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16절에도‘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주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모세가 회막에 나아갈 때에 9절에 보면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여기에 구름기둥이 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출애굽 할 때 광야 길을 걸어가는 첫걸음에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 개개인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특별히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찬송을 불렀습니다만, 주의 깊은 은총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상태였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죄에 끌려가며 살아가는 비참한 생활을 했던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에베소서 2장 1절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 고 이야기 합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는 ‘세상 풍속을 쫓는다’ 고 했습니다. 미래는 어떻습니까?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여러분이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고 또 비전도 없는 그런 삶이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셨는데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우리의 모든 죄로 인한 저주와 재앙의 문제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옮기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저주를 그리스도에게 다 던지셨습니다. 그 은총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9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 죽었던 자가 살아났고 세상 풍속을 좇을 수밖에 없던 자들이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뻐하는 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 주의 은총의 역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날마다 주님을 앙모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왜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앙모하며 주님 앞에 서야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광야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온 그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광야 길을 걸어가는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한 발짝도 걸어갈 수 없는 길이 광야 길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만 앙모하며 주님 앞에 서야 합니까? 우리의 눈을 들어 현장을 보십시오. 현장에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발짝 한 발짝 디딜 수 없는 현장입니다.
어제 새가족부에서 상반기(1~6월까지) 교회에 등록하신 분들을 중심으로 식사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시간에 참여한 새가족들이 하나교회에 오게 된 이유들을 한분씩 돌아가면서 듣게 되었는데, 제가 많은 기도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메시지를 어떻게 인도받아야 될 것인가? 중요한 답을 제 나름대로 얻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정말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현장 속에 있다가 오신 분들이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 각각의 이유와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가정의 문제, 어떤 분은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사실 조금만 눈 떠보면 진짜 한 발짝, 한 발짝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다스리는 사건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 속에 우리가 있구나 하는 것을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을 현장에 내보내시며 하신 말씀이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누가복음 10장 3절)’무슨 말입니까? 양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특별히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편 1-2절)’이 말씀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다윗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누이시는 풍성한 축복을 누렸구나하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자기의 삶 속에 진정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한 순간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는 내용을 고백하는 내용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러분, 우리를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가 쉴만한 곳이 있습니까? 두 다리 죽 뻗고 편히 쉴 만한 곳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10명의 자녀가 있다면 그 중에 9명이 잘되고 1명만 잘못되어도 부모의 마음은 그 1명에게 가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그 어떤 곳에서도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결국 영적인 문제입니다만, 마약에도 빠지고 술에도 빠집니다. 왜입니까? 편히 쉴 곳이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의 과거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우리 주변에 준비 되지 않은 다가오는 시련과 아픔들 또 예고 없이 왔던 우리의 불행과 고난들.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에게 별스럽지 않게 툭 하고 던지는 말 한마디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 병까지 듭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가정 안에도, 교회 안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가족 간의 분위기가 좋았었는데 저희 아들이 자기 누나에게 갑작스런 어떤 말을 듣고는 예민해져서는 밖으로 나가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는 주먹으로 벽을 쳤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상처가 되었는지 깁스를 해서 왔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그 한 마디 말 때문에 마음이 상하게 되고 심령이 상하게 되고 심지어 밤 잠을 못자게 되고 병까지 들게 됩니다. 그것이 가정 안에도, 교회 안에도 일어납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스스로 푸른 풀밭에 누울 수가 없고 쉴 만한 물가로 갈수 없는 것이 인생이구나… 이것이 다윗의 시편 23편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좋은 뜻으로 한 고백이 아니라 진짜 우리 인생을 바라보니까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는 곳이 없고 푸른 풀밭에 누울 곳이 없다는 사실의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목동의 자리에서 왕 까지 된 사람입니다. 가장 안 좋은 비참한 것을 다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자리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자신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보호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물론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반듯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 세상의 흑암의 문화, 타락의 문화 속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회에 보내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만, 그 이유야 어떻든지 우리의 자녀들을 보호할 수 없는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길도 우리가 모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모세가 그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우리가 가는 길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은혜가 날마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축복과 그 사명이 얼마나 엄청난 것입니까?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세계복음화라는 사명을 주셨어요. 세계복음화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가진 것 다 내려놓고 이 시간에 하나님 바라볼 때, 이 시간에 여러분 모든 삶의 현장에 흑암이 꺾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다가 결국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봤는데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송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다 내려놓고 진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기적으로 역사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주신 응답이 어떤 축복이었습니까?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함께 동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의 여정 앞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이 인도해나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는 말씀은 '내 얼굴로 가리라, 내 존재로 가리라' 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출애굽기 33장 3~5절에 보면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내가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했는데 오늘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하리라', 17절에 보면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할렐루야!
2. 어느 정도로 기도해야 합니까?
여러분,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어느 정도로 기도하면 되느냐? 여러분이 임마누엘 누릴 수 있을 정도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 임마누엘입니다. 모든 문제, 장소를 향한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이 속에 참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 속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함께 동행하는 축복된 힘을 회복하시고 그 힘을 얻게 되면 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달라지고 해석이 되어집니다. 참된 응답을 누림으로 승리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1년 6월 26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출33:7-16)
서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되었을 때, 온 애굽 사람들로 높임을 받았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되었을 때, 애굽의 노예로 전락케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앙모한다는 것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기도를 의미합니다(렘33:3; 사40:31).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원수와 대적을 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입니다.
1. 우리는 왜 여호와를 앙망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1) 하나님만이 변하지 아니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사40:8-9).
1) 우리의 중심을 내놓고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
2) 사람은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
3) 도울 수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 것(시146:3; 미7:5)
4) 영원히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기에 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함
① 구약 - 하나님이 주신 언약 되시는 여자의 후손(창3:15)
② 신약 - 하나님이 주신 언약 되시는 그리스도(마16:16)
③ 현재 - 영원한 언약의 핵심을 붙잡은 자에게 지금도 그 약속을 성취시켜 나가심
(2)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성경적 증거
① 출13:21
② 출33:9
③ 출33:13
④ 출33:16
2)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전 인간의 영적상태
①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엡2:1)
② 세상 풍속을 좇던 상태(엡2:2)
3)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심 - 그리스도
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심(롬5:8)
② 모든 저주와 재앙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심
③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선물로 얻게 됨(엡2:8-9)
(3) 왜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가?
1)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
2) 우리의 현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장이기 때문
(4)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에게 주신 응답
1)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심을 약속(출33:13)
2)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친히 인도해나가시겠다 약속(출33:17)
2. 어느 정도로 기도해야 하는가?
(1) 임마누엘 누릴 수 있을 정도로 기도하면 됩니다(임마누엘의 축복).
(2) 하나님의 원래 목적 자체가 임마누엘이기 때문입니다.
1) 모든 문제, 모든 장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임마누엘임
2) 임마누엘 안엣 참된 힘을 얻게 되는 것임
결론: 이번 한 주간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 속으로 들어감으로 주님이 함께 동행하는 축복된 힘을 회복하시고 그 힘을 얻게 될 때,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고 해석이 되어집니다. 참된 응답을 누림으로 승리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출애굽기 33장 7~16절)
7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12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Exodus 33:7~16
■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전도자의 삶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지난주 화요일에는 다락방 전도총회에서는 가장 축복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개혁측에 영입되어짐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도로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세워지게 된 축복을 지난 화요일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격스러운 자리였고 참석한 분 모두가 순서마다 박수를 치고 울먹이며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복음만 증거하기 위해서 주의 종들부터 시작해서 교회 성도들이 하나되어 달려왔는데 하나님께서 응답을 통해 새롭게 한국교회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봅니다. 예배에 참여하지 못한 분들이 조금이나마 그 감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인터넷 웹사이트 RUTC 방송국 메인 화면 우측편에 ‘영입감사예배’ 라는 배너가 있습니다. 예배 전체 실황들을 메시지와 함께 시청할 수 있도록 조치되어 있습니다. 정말 앞으로 어렵고 힘든 부분들이 없지 않아 남아있지만 참 복음가지고 교회를 섬기며 현장의 우상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이 기도해주시고 우리교회가 이 일에 축복 누리는 교회로 개개인들에게 실제적인 증거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고 기도하면서 응답받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목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왕과 군인들로 온 애굽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조금씩 단절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대국 이집트의 노예로 들어갔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요셉에 의해 그의 아버지인 야곱이 그의 일족 75명을 데리고 이민을 가게 된 것입니다. 특급 케이스로 이민을 가게 된 사례여서, 아마 그 당시 최고 좋은 땅을 얻어 오늘날로 이야기 한다면 청와대나 백악관 근처에 땅을 얻어 그곳에서 야곱 일족 75명이 함께 살며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요셉이 그 나라의 국가적 경제위기를 극복하게 되고 애굽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여지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로 왕이 가만히 보니 자칫 잘못하면 강성해지는 이스라엘 민족들로 인해 애굽이 힘을 잃어 애굽백성이 도리어 노예될 수도 있겠다는 계산 하에 ‘이렇게 놔두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애굽의 바로 왕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독자를 세워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예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노예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되니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노예생활 가운데 한 지도자 모세를 세워 애굽에서 출애굽 시키는 사건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나와 광야 길 가는 동안에 지도자 모세가 잠시 산에 기도하러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현장을 놓고 모세가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를 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가르쳐서 내 백성이 이런 죄를 범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이름을 생명록에서 지우는 일이 있더라도 이 일을 막겠습니다” 라는 간절한 기도가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나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출애굽기 3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 그러면서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리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도록 하겠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흑암이 꺾여지고 다 살게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게 되면 여러분과 관계된 모든 현장에 흑암이 꺾여지고 다 살아나는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예배가 ‘내 생애 최고의 예배가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시고 오늘 최고로 은혜입어 한 주간의 모든 흑암이 꺾여지고 모든 축복의 문들이 열려지는 축복의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32장에 이어 33장 12절부터 보면, 모세의 중보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나오게 됩니다. 32장에도 보면 모세의 중보기도가 나오지만 33장 12~13절에도 마찬가지로 등장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하나님의 종 모세가 그의 나라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 내용이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는데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아멘. 이러한 응답을 받게 되고 이런 응답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증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15~16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또 다시 모세가 자기 백성을 위해 증표를 요구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또 응답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아멘.
오늘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갔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는 말씀을 듣고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새로운 은혜와 응답 그리고 새로운 말씀도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여호와께 나아오라’ 그래서 오늘 7절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이 본문을 가지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에 여호와를 앙모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기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말과 앙모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에서 이 본문을 설명할 수 있다면,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란 말씀은 단순히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만을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며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않는 새 힘을 어떤 자에게 주십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말씀했습니다.
시편 81편에 13절에 보면 그때 하나님이 14절에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손을 들어 원수와 대적을 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하면 모든 문제 해결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의 많은 경우,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하나님만 간절히 찾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게 될 것인데, 거의 터무니없는 말들에 속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상담을 요청해왔습니다. 다른 교회 집사님이신데 “목사님,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어서 목사님께 상담을 요청합니다” 제가 “집사님 교회 담임목사님이 계시지 않으시냐?”고 질문했더니 “우리교회 목사님께는 말씀드릴 수가 없다” 하시기에 그래서 제가 그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용인즉, 사실 있지도 않은 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말들과 상황 때문에 이상한 입장으로 곤란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낯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움에 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이 공격해 오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힘들고 어렵습니다”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생애동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지 않습니까?” 제가 그 분의 삶에 대해 들었기에 알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려웠던 가정의 문제도, 자녀의 문제도, 사업의 문제도 하나님의 은혜입고 하나님이 해결해주신 것 아닙니까? 대꾸하면 똑같은 수준이 되니까 전혀 대꾸하지 말고 하나님이 과거에 나를 인도하신 부분이 확실하다면 이 문제 속에서도 인도하실 줄로 믿는 믿음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라고 권면하고는 시편 35편 1절의 다윗의 기도를 전달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다윗이 이런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를 알려드렸습니다. 얼마 지난 후 이분이 감사하다며 정말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음의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결하려하면 물론 해결될 수는 있겠죠. 그러나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손 보셔야 완전하게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터무니없는 말 때문에 시험받고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 성도들이 서로 마음의 중심을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 그것은 아니거든요. 내게 있는 문제와 어려움들을 함께 놓고 기도하며 함께 힘이 되어지고 함께 영적인 싸움을 싸워주는 것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축복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듣기에도 “말이 많은 사람들이라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말하기 싫다” 라는 경우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되는지 아십니까? 교회가 성령충만 하지 아니하면, 말에 악한 사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격해와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그래서 정말 하나되지 못하게 하며 복음의 역사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성령충만함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고 말로 인한 악한 사탄의 시험에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나 귀중하게 축복받은 존재인데 교회 안에서 많은 갈등들, 불신앙들, 말들 때문에 우리 영혼을 사탄에게 내동댕이쳐 져버린다면 그것은 속는 것이며 죽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이런 저런 상처와 분노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정말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지는 그 축복이 교회 안에서부터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1. 우리는 왜 여호와를 앙모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그러면, 오늘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라고 제목을 삼았는데 우리가 왜 여호와를 앙모하고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왜 주님 앞에 서야 하느냐? 이유는 이 땅의 모든 것은 다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이 변하지 않고 말씀 주시는 하나님이 변하지 않기에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중심을 내놓고 기도할 수 있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이사야40:8)’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 변합니다. 이 땅의 모든 것 다 지나가고 다 변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상담해오면 이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목사님만 알고 계세요” 그러면 저는 “그런 제게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만 알 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입이 가벼워서 저만 알 수 없어요. 무엇을 말씀드리고자 하느냐? 우리는 진실을 그냥 받아들일 수 없어요. 거의 다 자기 입장에서 듣고 말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들도 거의 다 자기 입장에서 듣고 말하고 합니다. 다 변합니다. 그래서 시편 146편 3절에 보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변합니다. 그리고 저는 왜 “목사님만 알고 계십시오” 라는 말을 듣기를 싫어하는지 아십니까? 저도 때로는 믿음이 흐트러질 때, 그 말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혹이나 그분이 다른 문제와 사건 생기면 그것 때문에 “저 말은 내게 하는 말이다”라고 오해해서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놓치고는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데 그러면 죽는 것과 일반입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대상은 그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어떤 문제가 있든 지간에 하나님 앞에는 다 아뢰십시오. 여러분의 중심을 그대로 받으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은 풀과 같고 꽃과 같아서 변하지만, 우리 하나님은‘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이사야40장 8절)’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말씀하시는 그 분은 영원히 말씀을 성취 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께 여러분의 모든 것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마자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구약의 모든 인물들이 그 언약 붙잡고 응답받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신약의 그리스도를 깨달은 자들을 통해서 시대의 역사를 이끌어가셨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에게 응답하시고 축복하시느냐? 영원한 언약인 그 핵심인 언약을 붙잡은 자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그 약속을 성취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만을 앙모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져 나왔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언약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심심하면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낸 나 여호와니라"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언약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 그 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도 그들이 잡은 언약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 어느 정도로 이 언약을 확실히 붙잡았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고향 땅을 떠나 온 이민 1세대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죽을 날이 가까우면 고향이 그리워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묘를 가나안 땅 세겜에 썼습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산 땅 가나안 땅 세겜입니다. 거기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살 수 있을 만큼 큰 땅입니다. 바로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크기의 땅입니다. 거기를 돈 주고 사서 아브라함이 장사되었고 아내 사라도 거기에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이삭)도 거기에 장사되었고 그의 손자인 야곱도 가나안 땅에 장사 되었습니다. 죽자마자 요셉이 야곱의 시신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장사 지내고 돌아왔죠. 그런데 요셉은 자기를 이 땅에 묻고 4백년 후에 자기의 해골을 가나안 땅으로 가지고 갈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백 년 동안 종살이 할 것인데 만약에 요셉의 해골이 가나안 땅에 묻어져 있다면, 후대들이 일어나면서 4백년간 종살이 하는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후대들이 가나안 땅의 언약을 잊어버릴 것이 아닌가! 라는 언약적 중심이 있었기에 요셉은 자기의 뼈를 먼 훗날 가나안 땅에 돌아갈 때 자기의 해골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묻을 것을 당부 하였습니다. 그들 중심에는 '가나안 땅' 이라는 이 언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요셉은 4백 년 후에 자기 시체를 가지고 가라는 말이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4백 년 동안 애굽에 살면서 언약을 놓치고 잊어버릴까봐… 그 중심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고 그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언약을 주신 하나님만 앙모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앞에서 다 좋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미가서 7장 5절에 보면,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품 안에 있는 아내에게 조차도 입을 지키라고 합니다. 정말 언약되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답을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왜 여호와를 앙모해야 하느냐?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16절에도‘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주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모세가 회막에 나아갈 때에 9절에 보면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여기에 구름기둥이 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출애굽 할 때 광야 길을 걸어가는 첫걸음에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 개개인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특별히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찬송을 불렀습니다만, 주의 깊은 은총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상태였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죄에 끌려가며 살아가는 비참한 생활을 했던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에베소서 2장 1절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 고 이야기 합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는 ‘세상 풍속을 쫓는다’ 고 했습니다. 미래는 어떻습니까?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여러분이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고 또 비전도 없는 그런 삶이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셨는데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우리의 모든 죄로 인한 저주와 재앙의 문제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옮기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저주를 그리스도에게 다 던지셨습니다. 그 은총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9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 죽었던 자가 살아났고 세상 풍속을 좇을 수밖에 없던 자들이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뻐하는 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 주의 은총의 역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날마다 주님을 앙모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왜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앙모하며 주님 앞에 서야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광야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온 그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광야 길을 걸어가는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한 발짝도 걸어갈 수 없는 길이 광야 길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만 앙모하며 주님 앞에 서야 합니까? 우리의 눈을 들어 현장을 보십시오. 현장에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발짝 한 발짝 디딜 수 없는 현장입니다.
어제 새가족부에서 상반기(1~6월까지) 교회에 등록하신 분들을 중심으로 식사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시간에 참여한 새가족들이 하나교회에 오게 된 이유들을 한분씩 돌아가면서 듣게 되었는데, 제가 많은 기도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메시지를 어떻게 인도받아야 될 것인가? 중요한 답을 제 나름대로 얻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정말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현장 속에 있다가 오신 분들이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 각각의 이유와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가정의 문제, 어떤 분은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사실 조금만 눈 떠보면 진짜 한 발짝, 한 발짝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다스리는 사건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 속에 우리가 있구나 하는 것을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을 현장에 내보내시며 하신 말씀이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누가복음 10장 3절)’무슨 말입니까? 양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특별히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편 1-2절)’이 말씀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다윗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누이시는 풍성한 축복을 누렸구나하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자기의 삶 속에 진정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한 순간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는 내용을 고백하는 내용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러분, 우리를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가 쉴만한 곳이 있습니까? 두 다리 죽 뻗고 편히 쉴 만한 곳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10명의 자녀가 있다면 그 중에 9명이 잘되고 1명만 잘못되어도 부모의 마음은 그 1명에게 가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그 어떤 곳에서도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결국 영적인 문제입니다만, 마약에도 빠지고 술에도 빠집니다. 왜입니까? 편히 쉴 곳이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의 과거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우리 주변에 준비 되지 않은 다가오는 시련과 아픔들 또 예고 없이 왔던 우리의 불행과 고난들.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에게 별스럽지 않게 툭 하고 던지는 말 한마디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 병까지 듭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가정 안에도, 교회 안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가족 간의 분위기가 좋았었는데 저희 아들이 자기 누나에게 갑작스런 어떤 말을 듣고는 예민해져서는 밖으로 나가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는 주먹으로 벽을 쳤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상처가 되었는지 깁스를 해서 왔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그 한 마디 말 때문에 마음이 상하게 되고 심령이 상하게 되고 심지어 밤 잠을 못자게 되고 병까지 들게 됩니다. 그것이 가정 안에도, 교회 안에도 일어납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스스로 푸른 풀밭에 누울 수가 없고 쉴 만한 물가로 갈수 없는 것이 인생이구나… 이것이 다윗의 시편 23편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좋은 뜻으로 한 고백이 아니라 진짜 우리 인생을 바라보니까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는 곳이 없고 푸른 풀밭에 누울 곳이 없다는 사실의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목동의 자리에서 왕 까지 된 사람입니다. 가장 안 좋은 비참한 것을 다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자리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자신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보호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물론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반듯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 세상의 흑암의 문화, 타락의 문화 속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회에 보내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만, 그 이유야 어떻든지 우리의 자녀들을 보호할 수 없는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길도 우리가 모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모세가 그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우리가 가는 길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은혜가 날마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축복과 그 사명이 얼마나 엄청난 것입니까?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세계복음화라는 사명을 주셨어요. 세계복음화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가진 것 다 내려놓고 이 시간에 하나님 바라볼 때, 이 시간에 여러분 모든 삶의 현장에 흑암이 꺾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다가 결국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봤는데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송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다 내려놓고 진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기적으로 역사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주신 응답이 어떤 축복이었습니까?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함께 동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의 여정 앞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이 인도해나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는 말씀은 '내 얼굴로 가리라, 내 존재로 가리라' 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출애굽기 33장 3~5절에 보면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내가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했는데 오늘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하리라', 17절에 보면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할렐루야!
2. 어느 정도로 기도해야 합니까?
여러분,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어느 정도로 기도하면 되느냐? 여러분이 임마누엘 누릴 수 있을 정도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 임마누엘입니다. 모든 문제, 장소를 향한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이 속에 참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 속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함께 동행하는 축복된 힘을 회복하시고 그 힘을 얻게 되면 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달라지고 해석이 되어집니다. 참된 응답을 누림으로 승리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1년 6월 26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출33:7-16)
서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되었을 때, 온 애굽 사람들로 높임을 받았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되었을 때, 애굽의 노예로 전락케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앙모한다는 것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기도를 의미합니다(렘33:3; 사40:31).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원수와 대적을 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입니다.
1. 우리는 왜 여호와를 앙망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1) 하나님만이 변하지 아니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사40:8-9).
1) 우리의 중심을 내놓고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
2) 사람은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
3) 도울 수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 것(시146:3; 미7:5)
4) 영원히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기에 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함
① 구약 - 하나님이 주신 언약 되시는 여자의 후손(창3:15)
② 신약 - 하나님이 주신 언약 되시는 그리스도(마16:16)
③ 현재 - 영원한 언약의 핵심을 붙잡은 자에게 지금도 그 약속을 성취시켜 나가심
(2)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성경적 증거
① 출13:21
② 출33:9
③ 출33:13
④ 출33:16
2)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전 인간의 영적상태
①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엡2:1)
② 세상 풍속을 좇던 상태(엡2:2)
3)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심 - 그리스도
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심(롬5:8)
② 모든 저주와 재앙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심
③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선물로 얻게 됨(엡2:8-9)
(3) 왜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가?
1)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
2) 우리의 현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장이기 때문
(4)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에게 주신 응답
1)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심을 약속(출33:13)
2)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친히 인도해나가시겠다 약속(출33:17)
2. 어느 정도로 기도해야 하는가?
(1) 임마누엘 누릴 수 있을 정도로 기도하면 됩니다(임마누엘의 축복).
(2) 하나님의 원래 목적 자체가 임마누엘이기 때문입니다.
1) 모든 문제, 모든 장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임마누엘임
2) 임마누엘 안엣 참된 힘을 얻게 되는 것임
결론: 이번 한 주간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 속으로 들어감으로 주님이 함께 동행하는 축복된 힘을 회복하시고 그 힘을 얻게 될 때,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고 해석이 되어집니다. 참된 응답을 누림으로 승리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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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
1469 |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 단6:16-28 | 2025-01-12 | |
1468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 단5:17-31 | 2025-01-05 | |
1467 | [2025 송구영신예배]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 갈4:4-7 | 2024-12-31 | |
1466 | 땅의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 단4:28-37 | 2024-12-29 | |
1465 | 완전한 승리를 내 것으로 누리는 성탄 | 눅2:8-14 | 2024-12-22 | |
1464 | 언약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계시는 하나님 | 단3:8-18 | 2024-12-15 | |
1463 | 손대지 아니한 돌 | 단2:25-35 | 2024-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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